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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인들의 인장(2)

장전 2007. 3. 2. 04:47

 

 

 

강희안(姜希顔)

1417년(태종 17년)~1464년(세조 10년).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강 희맹의 형이기도 하다.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는 않는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가 사신으로서 중국을 다녀와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되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 금인 소신지보와 세조 때 을해자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최초의 원예서로 알려진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강희안이 직접 화초를 키우면서 알게된 화초의 특성과 재배법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노송,매화,국화,석류화,치자화,귤나무 등 모두 17종의 꽃과 나무,그리고 이를 기를때 주의해야 할 일곱가지 항목으로 구성됐다.
이책이 국내 최고(最古)의 원예서라는 점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꽃과 나무의 품격과 상징성을 서술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천하를 다스리는 뜻을 함께 담아냈다는 점이다. 지각도 운동능력도 없는 풀 한포기의 미물이라도 그 풀의 본성을 잘 살피고 그 방법대로 키운다면 자연스레 꽃이 피어난다는 책은 단순한 원예서를 지나 수신과 치국의 책이다.

 

강희안의 인장

 

 

윤두서(尹斗緖)
윤두서(1668-1715)는 우리 회화사상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화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1693년 스물다섯 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다. 1712년 45세 때에는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蓮洞)으로 낙향하여 그림과 글씨를 벗하며 보냈는데, 특히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고,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도 은연중 영향을 미쳐 실학적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의 녹우당(綠雨堂)에는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적인 경향을 알려주는 지도며 그림첩 등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그의 소장품 중에는 남종 문인화풍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도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유명한 윤두서의 〈자화상〉과 〈채애도〉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윤씨가전고화첩」과 다수의 그림이 전하며, 저서로는 「기졸(記拙)」이 있다.

 

윤두서의 인장

 

孝彦

相思一夜發

恭齋

尹斗緖字孝彦


작품설명
얼굴만 떠올라 있는 듯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풍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전신상이나 반신상도 아닌 얼굴만을 화면에 떠올린 자화상을 보면 세계 어느 초상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풍만한 얼굴에 반듯한 눈썹, 정면을 응시하는 눈, 그리고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수염 등은 선비의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고, 마치 살아 있는 얼굴을 보는 듯하다.
그의 인간적인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에서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알 수 있다.

종이에 담채
38.5cm x 20.5cm
해남 녹우당 소장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년(정조10년)에 경주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1856년(철종7년)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實學)과 금석학(金石學)에 큰 업적을 쌓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등 을 썼다.
어려서 부터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실사구시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병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24세 때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 등과 돈독히 교류하였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1840년에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에서 그는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함으로써 우리 서예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가 이룩한 독특한 서체는 그의 학문적인 깊이와 함께 오랜 유배 생활의 고독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서예를 바탕으로 그림에서도 이른바 남종 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특유의 개성과 천재성이 번득인다. 그는 묵란(墨蘭)과 산수를 잘 그렸고, 예술에 대한 감식안도 당대의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문인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당시 화단에 만연해 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등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로써 모처럼 일어난 민족적인 화풍의 세가 꺾이고 다시금 전통적인 문인화풍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세한도〉와 〈부작란도〉<지란병분〉 등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인장

阮堂

金秋史氏

阮堂

阮堂

金正喜印

 

 

이하응(李昰應 : 대원군)
1820년(순조20년)에 태어나 1898년(광무2년)에 사망하였다. 字는 시백(時伯) 호는 石坡이다.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 구의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9년)에 흥선군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명복(命福)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는 척족정치를 근절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등 내치에는 상당한 업적을 남겼으나 천주교 탄압, 쇄국정치의 강행 등 국제정치조류에 어두운 외교정책을 취함으로써 새로운 조류에 역행하는 실정을 저질렀다.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난초에서는 석파란이라는 복합명사가 만들어질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중국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뒤의 작품에는 특히 수작이 많다.

 

이하응의 인장

 

 

장승업(張承業)
1843년(헌종9년)에 태어나 1897년(고종원년)에 사망한 그는 자가 경유(景猷) 호가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대원인(大元人)이며 화원으로 감찰을 지냈다. 장지연의 「일사유사(逸事遺事)」에는 장승업의 생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승업이 자호는 오원이요 그 선세는 대원인이며 무반이다. 조실부모하고 집도 가난하여 의탁할 곳조차 없었다. 총각으로 굴러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수표교에 있는 이동지 응헌의 집에 기식하고 간혹 한성판윤 변원규의 집에도 있었다. 승업은 어릴 적에 글을 못 배웠기로 문자에는 캄캄하였다. 그러나 총민하여 주인집의 글읽는 아이들을 따라서 곁듣고 거의 이해하게 되었다. 그 집은 元 明이래 명인의 서화를 많이 수장하고 있어 그림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모여 관람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승업도 매양 주목하여 오던 바 숙업처럼 문득 깨달음이 있어 神이 모이고 뜻이 통했다. 평생에 붓대도 쥘줄 몰랐다는데 하루는 문득 붓을 잡고서 손이 내키는 대로 일필하여 죽 난 매  석 산수 등을 그려 보니 다 자연천성하여 신운이 떠올랐다.」
다소 광장이 있는 듯한 이 小傳에서도 살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서권기와는 도시 인연이 먼 불학무식한 화공이었지만 그러나 그 기량에 있어서는 조선왕조 500년에 그에 필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떤 테마에도 손대지 않는 것이 없었고 어떤 화법에도 자유자재였다. 골격이 힘차고 묵법이 무르익은 그의 그림이 많으며 특히 달리는 말의 신운이 서린 듯한 감동은 대화가의 면목을 보여 준다.
오원의 천재성은 영정년간에 무르익은 서민의식을 섭취한 진경사누 및 풍속화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중국의 범본에로 되돌아간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범본(範本)에의 복귀는 장승업 개인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대의 미술애호가였던 권세가와 중인들의 기호 및 계층성격에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승업의 인장

작품설명
<송하노승도>는 노승의 모습이나 소나무 표현 등 양식적으로 서울대 소장품과 거의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표범 대신 불경을 두 손으로 바치는 원숭이가 그려져 있다. 화면 한쪽을 가로막다시피 한 소나무 줄기는 비상하는 용처럼 힘차게 위로 뻗었고, 위에는 무성한 가지가 아래로 드리워 있다. 소나무 뿌리 쪽에는 장승업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더부룩한 잡목이 우거져 있다. 화보에 나오는 딱딱한 도상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탈바꿈시킨 데에서 장승업의 놀라운 회화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소나무 아래 노승을 그리는 구도는 도석인물화에서 오래된 전통적인 것이다.

지본담채 136x35.1cm

호암미술관

 

 

 

신윤복(申潤福)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 김홍도(金弘道)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신윤복(1758-?)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字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으로 화원이었던 신한평(申漢枰)의 아들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가 도화서 화원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산수화에서도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기량이 뛰어난 쪽은 역시 낭만적인 풍속화이다.  그러나 그의 풍속화는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 방법,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색을 쓰는 법 등에서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주로 다루었던 반면, 그는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그리고 이러한 남녀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매우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한 까닭에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림의 주제가 너무 선명하여 때로는 오늘날 보기에도 낯이 붉어질 내용도 적지 않으나, 그 의 천재성은 이처럼 에로틱한 장면도 절제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의 춘화도는 짐짓 눙치며 익살을 떠는 은근함이 있고, 여인상은조선 여인만의 깔끔하면서도 요염한 멋을 남겨놓았다.  또한 그의 풍속화는 당시의 살림살이와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어 당시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의 작품으로는 대표작인 〈미인도〉<단오도> <선유도> <연상의여인> <월하정인>외에 많은 수의 풍속화가 전한다.

 

신윤복의 인장

 

 

 

민영익(閔泳翊)
1860년에 태어나 1914년에 사망한 그는 자가 자상(子湘) 호가 예미(藝楣), 죽미(竹楣),원정(園丁)이며 고종 14년에 문과에 급제 판서를 지냈다. 시문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난 죽 괴석에도 이름이 높았던 그는 필기(筆氣)가 궁건쾌할하였다. 석파와 같은 시대이면서도 예리하고 리드미컬한 석파난과는 달리 청인의 취향이 가미된 건실한 건란으로 독특한 개성과 운치가 스며 있다. 아마도 그것은 상해피거시에 오창석을 비롯한 명류들과 사귀면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김용진 소장의 「난도」를 비롯하여 유품이 많다.

 

민영익의 인장

 

(민영익의 묵란)

 

 

 

강세황(姜世晃)
1713년(숙종39년)에 출생하여 1791년(정조15년)에 사망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서화가이며 평론가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이다. 60세가 넘어서야 벼슬을 살기 시작하였고, 72세 때인 1784년에는 천추부사로 연경에 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세황은 특히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진경산수의 발전과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생 동안 습기(習氣)나 속기(俗氣)가 없는 문인화의 경지를 추구하여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를 통해 그의 그림에 대한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의 현존 작품도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많아 그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여러 산수화첩 외에 자화상을 비롯한 여러 폭의 초상화도 남기고 있는데, 자화상은 그가 묘사력도 뛰어난 화가임을 보여준다. 진경의 표현에도 관심을 두어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과 같은 독특한 느낌의 진경 산수 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벽오청서도〉와 〈피금정도〉 등이 유명하다.

 

강세황의 인장

姜世晃印

豹庵

姜世晃印

光之

豹翁

姜世晃印

 

 

 

오세창(吳世昌)
1864년(고종원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하였다.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中銘), 호는 위창(葦滄)이다.
한성주보 기자, 농,상공부 참의(參議), 체신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개화 운동에 공헌하였으며,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서예가로서 전각(篆刻)도 잘하였으며, 서화의 감식에도 조예가 깊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 오경석(吳慶錫)이 수집한 우리 나라 서화가의 사적을 조사하여 1928년 서화계의 중요한 문헌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근역인수(槿域印藪)」를 간행하였다.

 

오세창의 인장

(오세창의 세한도 발문)

 

 

 

 

 

출처 : 月潭會(월담회)
글쓴이 : 김정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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