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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인들의 인장(1)

장전 2007. 3. 2. 04:46

 

 

안평대군(安平大君)
태종 18년∼단종 1년(1418∼1453). 향년 38세. 조선 전기 왕족·서예가.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玗居士)·매죽헌(梅竹軒). 이름은 용(瑢). 세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세종 10년(1428)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다음해 좌부대언(左副大言)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함경도에 육진(六鎭)이 신설되자 북변경계임무를 맡아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과 제휴, 수양대군(首陽大君) 측의 무신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혀 이때부터 조정의 배후실력자로 등장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그 뒤 실권회복에 힘썼으나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
로 황보인·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강화도(江華島)에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桐)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서·화·가야금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해졌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특히 시문과 서예에 뛰어나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높은 경지에 이른 명필이다. 영조 때 복호(復號)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가 내렸다. 유필로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전한다

 

 

 

이정영(李正英)
1616년(광해군8년)에 전주이씨 집안에서 태어나 1686년(숙종12년)에 사망하였다. 字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이다. 호조판서 이경직의 아들로 병자호란 후에 세자가 불모로 심양에 갈 때 사서로 따라갔으며 한성부판윤을 거쳐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였다.

 

이정영의 인장

 

 

한호(한석봉)
1543년(중종38년)에 三和韓氏 집안에서 태어나 1605년(선조38년)에 사망하였다. 字는 경홍, 호는 석봉(石峯)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극진한 뒷바라지를 받으며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히고 해서 행서 초서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이른 바 석봉체라고 이르는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의 模刊이 전해 오고 있으며 그 서법체들은 당시의 서예의 궤범이 되었다. 속기가 있는 것이 흠이나 한국서예사에서의 그의 존재는 중국서법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한국서예의 길을 트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석봉의 인장

 

 

 

 

김두량(金斗樑)
1696년(숙종22년)에 경주김씨로 태어나 1763년(영조39년)에 사망한 그는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 . 예천(藝泉)으로 영조대에 주로 활동한 화원으로 산수 . 인물 . 영모 등에 두루 뛰어났다.
그는 부친 김효경도 화가였으며, 아들 김덕하가 1748년 숙종어진 모사에 참가한 화원인 것으로 보아 화업을 대물림한 집안임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외조부인 함제건도 화원으로 1682년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바 있어서, 김두량의 그임에 있어서의 오랜 집안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김두량은 산수(山水), 인물(人物), 풍속(風俗), 영모(翎毛) 등 여러 방면의 그림에 능숙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북종화풍을 따르면서도 남종화법이나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목동오수(牧童午睡)」와 「추동전원행렵도(秋冬田園行獵圖)」 같은 풍속화와 서양화법을 보여주는 「긁는 개」 등의 동물화도 전한다.
강세황은 김두량의 「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의 발문에서 명수(名手)라 평했고, 임금이 남리(南里)라는 호를 하사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김두량은 18세기 화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작에 「월야산수도」가 있으며, 이 밖에도 「춘하도리원호흥도(春夏桃李園豪興圖)」「월하계류도(月下溪流圖)」「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목우도(牧牛圖)」「맹견도(猛犬圖)」 등이 있다.

 

김두량의 인장

 


작품설명
이 그림은 낙관에 보이는 갑자라는 간기로 미루어 49세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안개 낀 늦가을의 으스름한 달빛 풍경을 독특한 묵훈법(墨暈法)으로 실감있게 표현하여 그 쓸쓸한 정취가 가슴에 스미는 듯하다.

이처럼 자율화된 기법으로 한국 자연의 스산스러운 정취를 실감있게 나타내 준 예는 매우 드물다.  

 


 

 

 

 



 

 

 

이인문(李寅文)
1745년(영조21년)에 해주이씨 집안에서 태어나 1821년(순조21년)에 세상을 떠났다. 字는 문욱(文郁), 호는 고송(古松) 유수관도인(流水館道人) 유춘(有春) 자연옹(紫煙翁)이다.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으로 함께 도화서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고, 당시 문인 화가였던 강세황, 신위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산수, 영모(翎毛), 포도, 도석인물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당시 크게 유행하였던 진경산수나 풍속화보다는 전통적인 소재를 즐겨 그렸다.
특히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길이가 8m 56cm에 달하는 거작으로 그의 회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강촌청우도(江村晴雨圖)> 를 비롯한 많은 산수화가 전한다. 독창적인 면에서는 김홍도만 못하다는 평도 받고 있으나 기량이나 격조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화가로 조선 후기의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인문의 인장

 

 

신위(申緯)
1769년(영조45년)에 평산신씨 집안에서 태어나 1847년(헌종13년)에 세상을 떠났다. 字는 한수, 호는 자하(紫霞), 경수당(警修堂)이다. 당시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 179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다. 1812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 중국의 학문과 문학을 실지로 보고 안목을 넓혔는데, 특히 중국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류는 그의 학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림, 글씨, 시로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시에서는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여 없어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였고, 글씨에 있어서는 명나라 동기창의 서체를 따라 이 서체가 유행하게 하는 데 계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림은 산수와 함께 묵죽에 능하였다. 강세황에게 묵죽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정(李霆), 유덕장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삼대 묵죽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명준(命準), 명연(命衍) 등에게로 이어졌으며, 저서로는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자하시집(紫霞詩集)」이 전한다.

 

신위의 인장

 

오경석(吳慶錫)
1831년(순조31년)에 해주오씨 집안에서 태어나 1879년(고종16년)에 사망하였다. 字는 원거이며 호는 역매(亦梅) ·진재(鎭齋)이다. 3 ·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의 아버지이다. 중인 출신인 그는 역관으로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신학문에 눈을 떠 개화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금석학 서예등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전자(篆字)에는 높은 수중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그림에도 열이 높아 원명(元明) 이래의 서화를 열심히 수집하였고, 상대진한의 금석과 진당(晋唐)의 비판(碑版)수집품도 수백가지에 이르렀다. 저서로서는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 있다.

 

오경석의 인장

 

안견(安堅)

안견은 1418년(태종18년)에 지곡안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라 했으며, 도화서 화원을 거쳐 벼슬이 호군에 이르렀다.
안평대군 이용의 총애를 받은 그는 안평대군의 풍부한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림을 보는 안목을 높일 수 있었을 뿐아니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와 같은 일대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듯하다.
안견에 대한 평가는 이미 당대에 비등했었다. 허백당은 안견의 청산백운도를 가리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라고, 박팽년도 세종이 안견에게 명하여 그린 팔준도(八駿圖)는 문신들이 다투어 읇을 정도의 절품이라고 극 찬하였으며, 남명 조식도 동국의 오도자라고 칭찬하였다.
현존하는 안견의 유작으로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안견작으로 전하는 설천도(雪天圖) 적벽도(赤壁圖) 및 산수소복이 몇점 있는데, 그것들은 거의 곽희풍을 따르고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노닐었다는 도원경을 수묵담채로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복숭아 꽃이 만발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실로 이상향다운 풍치를 이룩하고 있다.

 

안견의 인장

작품설명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에 본 아름다운 도원의 모습을 안견에게 들려주며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이다.
그림의 앞부분에 있는 안평대군이 직접 쓴 서문(序文)에는 세종 29년 4월 20일 한밤중에 박팽년을 비롯한 당시의 유명한 신하들과 함께 꿈속에서 도원을 유람한 내용을 자세히 적고 그 꿈을 줄거리로 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그 내용은 중국 북송대 도연명(陶淵明)이 쓴 도화원기(桃花園記)와 비슷한 내용으로, 이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도 여럿 전한다.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큰 바위가 가로막고 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들어가 보니 복숭아꽃이 활짝 핀 한가로운 마을이 열리고 몇몇 사람들만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년(영조21년)에 김해김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字가 사능(士能) 호가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안거사(高眼居士)이다. 5대조는 守門將을 지냈고 고조부는 종6품의 벼슬 ,증조부가 종4품의 萬戶를 지낸 중인 가문의 출신이다.타고난 그림 재주로 말미암아 圖畵署 畵員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7~8세 되던 해에 그의 천재성이 인정되어 사대부 화가 강세황(姜世晃)에게 인정받아 그의 훈도 아래 詩文書畵를 익혔기 때문에 성리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몸에 지닐 수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성리학을 사상 기반으로 하고 있던 진경시대 문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듯 하다. 단원은 그림 재주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기에 모든 화과(畵科)의 그림에 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인물,화조,사군자,누각 등을 다 잘하는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었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였다 한다.
그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어느 화과의 그림이거나 간에 모든 그림에 조선 고유의 색을 짙게 드러난다는 공통성이 있다.
산수화는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동해안 명승지를 그렸다는 해산첩<海山帖>에서 볼 수 있듯이 겸재의 사생기법으로부터 연유한 서릿발 준법으로 바위산을 표현하되,현재나 표암 강세황이 명대 남종화 기법을 수용해 들이면서 그 영향으로 변형시킨 부드러운 붓만을 가미하여 굳세고 씩씩하던 겸재의 붓질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런 온건한 필법은 아마 말기 문화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세련미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진경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단원이 지목되었을 수도 있다.  

 

김홍도의 인장

其人姓金氏名弘道字士能號丹邱古加縣人也

金弘道印

士能

 

선조(宣祖大王)
1552년(명종7년)에 태어나 1608년(선조41년)에 세상을 떠났다. 1567년에 조선 제14대왕으로 등극하였다. 이황 이이와 같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으나 당쟁에 말려 국력이 쇄약해져 급기야는 임진외란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서화에 뛰어났었고, 특히 난죽(蘭竹)에 탁월한 화재를 발휘했었다.

 

선조대왕의 인장

 

심사정(沈師正)
1707년(숙종33년)에 출생하여 1769(영조45년)에 사망하였다. 字는 이숙 호는 현재(玄齋)이며,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더불어 18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부사(府使)를 지낸 그의 아버지 심정주(沈廷胄)도 그림을 잘 하였다. 그는 젊어서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나, 때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南宗)산수화에 심취하여 스승인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보다는 전통적 중국 화제(畵題)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그의 작품은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훼(花卉), 초충(草蟲) 등 지금 많이 남아 있으며 이 작품들은 각기 여러 기법과 다양한 양식을 보인다. 그러나 많은 작품중 기년작(記年作)은 불과 몇 점에 불과하여 현재 그림 양식의 변천 과정을 더듬기는 매우 힘들다.
심사정의 작품으로는 <방심석전 산수도>, <파교심매도>, <강상야박도>, <하마선인도>, <초충도> 등이 있으며 그의 나이 61세에 그린 <경구화첩> 등이 있다. 

 

심사정의 인장

 

 

 

정조(正祖大王)
조선 왕조 제22대 왕(재위 1776∼1800).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와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들이다. 비(妃)는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이다. 선왕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의 격화 억제에 힘썼고, 1791년 신해교난(辛亥敎難)으로 윤지충·권상연 두 사람에게만 극형을 처하고 천주교 탄압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서적 편찬에 힘을 기울여서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대전통편(大典痛編)」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간행하였고, 친히 찬수한 「팔자백선(八子百選)」 「오경백선(五經百選)」 및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출간하였다. 특히 악형금지,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 반포 등으로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능은 수원의 건릉(健陵)이다.

 

정조대왕의 인장

 

정조대왕의 어필

 

 

 

 

출처 : 月潭會(월담회)
글쓴이 : 김정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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