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동트는 아침의 영서당

장전 2005. 9. 16. 20:05


 

 

고영진 (kohyj@hosim.kwangju.ac.kr)

 

 

지난 학기 말에 대학원 수업을 종강하면서 학생들과 담양에 있는 문화유적 몇 곳을 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씁슬한 기분을 아직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창평시장에서 국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호남 계몽운동의 선구자 고정주의 생가를 둘러본 뒤 대덕 장산리에 있는 모현관으로 갔다. 모현관은 조선 선조 때의 대학자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보물 제 260호인 『미암일기』는 조선 중기 문화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일 뿐 아니라 『선조실록』의 기초자료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모현관은 작지 않은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옆의 조그마한 산 중턱에는 유희춘이 만년에 지냈던 정자인 연계정이 있다. 그 연계정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경치는 소쇄원이나 면앙정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다른 맛이 있다. 모현관 뒤로는 유희춘의 후손이 사는 집이 있고 그 집 뒤뜰에는 사당인 미암사가 있다. 미암사 내부에는 다른 사당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채색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날 보니 사당 지붕이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임시로 비닐을 덮어 놓았지만 역부족이어서 빗물이 흘러들고 그 때문에 벽화도 점점 상해가고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언제 훼손되었느냐고 물으니 6개월이 넘었는데 군에서 아직 고쳐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았으면 그 건물은 이번 폭우나 태풍으로 더 크게 훼손되었을 것이다.

 

다음에 간 곳은 창평 장화리에 있는 이최선의 생가였다.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최선은 기정진의 문인으로 한말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켜 서울까지 진출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이승학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때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손자인 이광수는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비밀결사에 참여하여 의열투쟁에 나서다 체포되어 귀양을 갔으며 증손인 이혁은 전남대 문리대학장을 지내고 고손인 이한기는 국제법학자로 감사원장을 지냈다. 이렇듯 이최선집안은 500년 이상 담양에서 살아온, 호남 명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에 걸맞게 대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밑에 있는 생가도 옛 양반가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본 생가는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행랑채는 사라져 버리고 옛담도 현대식 담으로 바뀌어 버리고 마당은 완전히 주차장처럼 변해 고풍스러운 멋이 다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집에 사람이 없어

 

동네분들에게 물어보니 장손이 옛집을 보존하기가 힘들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그만한 집안이 옛집을 보존할 수 없다면

 

이 지역에서 어떤 집안이 옛집을 보존할 수 있을까. 씁슬한 마음으로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다시면 동당리에 있는 석관정이 생각이 났다. 신녕현감을 지낸 이진충이 1500년경 건립한 석관정은 영산강변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건립 연대로 보나 위치로 보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큰 이 정자는 보통 정자와 생김새가 다르다. 기둥의 아래 부분과 바닥이 돌로 되어 있어 마치 요즘 공원의 팔각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처에 살고 있는 후손에게 물으니 나무로 하면 비용도 많이 들고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에 돌로 했다는 것이다. 미암사, 이최선생가, 석관정, 이 문화유적들의 공통점은 호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도 못받고 후손들의 문화의식도 낮아 점차 훼손되고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이곳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민들의 삶과 유리된 박제화된 축제나 문화단지 조성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 결과 주변의 우리 삶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문화유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다. 문화유적이 사라져 가면 그 유적과 관련된 역사도 사라져 간다. 지역정체성, 문화정체성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할 때, 그러면 어디서 호남의 지역정체성, 문화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지방자치단체이든 지역민이든 이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호남신문』 2002. 9. 4)

 

 


 

'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고향  (0) 2005.10.13
영서당의 가을  (0) 2005.09.22
영서당 중수기  (0) 2005.09.16
안개낀 영서당에서 보는 대나무 숲  (0) 2005.09.16
선산  (0) 200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