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렀던 흔적들

<여행의 권유>

장전 2023. 5. 8. 05:39
1일 
 
 
<여행의 권유>
 
알프스 지도를 보다가 갑자기 이걸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2년 전에 오스트리아 그로스글로크너(Grossglockner) 산맥 로드 트립 체험을 포스팅하면서 인용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의 한 대목.
“멀다니 잘 됐어. ‘대부분의 문제는 지리(地理)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네 아빠가 말했지.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절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안 돼. 여행을 떠나 거리를 두는 게 나아.”
내 말이 그 말이다. 공간이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 이 공간에 존재하던 문제가 저 공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반드시 어떤 공간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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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중 80~100일 정도를 유럽에서 보내는데, 그러자면 돈과 시간이 필수다. 여행 가라고 정부에서 돈을 대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내가 만들어야 한다.
여행은 돈을 벌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알려주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당연히 더 벌게 된다. 약간 더 갖는 사람과 덜 갖는 사람의 차이는, 내 눈엔 그것밖에 안 보인다.
시간도 내야 한다. 달리 쓰던 시간을 빼내는 수밖에 없다.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쳐내야 한다. 나는 이점에서 강한 원칙을 갖고 있다. 가족과 친구 아니면 누구도 안 만나고 전화도 안 받는다. 거래처 관계자와 밥을 먹는달지, 회사 밖에서 만난달지 그런 건 내 사전에 없다. 일체의 상업적 교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 쇼핑, 쿠폰적립, 할인구매, 금융거래, 그밖에 소소한 일들도 웬만하면 안 한다. 골프도 칠 줄 모른다. 그렇게 모아진 시간에 충분히 놀고 뼈를 갈아서 일을 한다.
여행이 인생의 과제로 다가온 순간부터 내 생활을 여행에 최적화시켰다. 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옷차림부터 다르다. 스포츠웨어가 그들의 캐주얼이다. 매일 등산하는 사람들은 아예 문간에 배낭을 놔두고 산다. 말하자면 그런 식이다. 일 끝나면 예약이고 뭐고 필요 없이 그냥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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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문제를 지리로 해결한다고 했는데, 그 인생문제라는 게 뭔가. 의식주가 해결되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권태(倦怠)가 인생의 최대 문제 아닌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등장인물에 변화가 없으면 권태가 안 올 수가 없다. 그러면 사람을 괴롭히는 온갖 잡생각, 즉 상념(想念)이 머릿속을 젓고 다녀 살 수가 없다.
권태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아침에 눈을 떠야 하는 이유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살기야 살겠지만, 사는 것처럼 살기는 힘들다. 너무 익숙해지면 연애가 끝나는 것처럼 권태는 인생의 무덤이다.
그걸 지리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 하고도 남는다. 다만 가려는 곳이 확실해야 하고,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불처럼 일어야 한다. 그러면 갈 수 있고, 가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 욕망이야말로 삶을 일으켜 세우는 실체라고, 내 경험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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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심어놓은 여행지, 그 이름이 주는 인상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우연한 기회에 그 이름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2009년 이전에 나는 주말만 되면 와이프와 함께 우리나라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는데, 해외로 나갈 생각을 못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기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해에 “너 한번 가봐” 친구들이 계속 떠밀었고, 한 후배가 프랑크푸르트 행 티켓을 만들어줬다. 그때 몇 개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헤세, 바흐, 괴테 그리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오케스트라)였다. 그 이름들로부터 생겨난 열망이 공포를 이겨냈다.
현장에 가서 나는 절규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세계, 또 하나의 인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국경을 넘은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그 국경은 단지 군마현(県)과 니가타현의 경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의미하지 않는가. 경계를 넘어가면 설국이라는 전혀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내가 그랬다.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칼프, 밤베르크,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 포츠담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첫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인생을 재설계했다. 어디 틀어박혀 도면을 그린 건 아니고, 그냥 자동적으로 머리가 돌아갔다. 욕망이 그렇게 무섭다. 실제로 여권을 네 번 갱신하도록 서울-유럽 구간을 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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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내게 많은 걸 가져다주었다. 특히 일상에서 얻기 힘든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한 소득이 크다. 향수(鄕愁),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으려는 열망,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애정, 무엇보다 살려고 하는 의지! 물론 내 조국에서도 가능하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이질적일수록 효과가 더 컸다.
헤밍웨이의 멋진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나오는 끔찍한 문장. “눈앞에서 그렇게 인생이 빨리 지나가고 있는데, 난 도무지 제대로 사는 것 같질 않아. 그걸 견딜 수가 없어! I can't stand it to think my life is going so fast and I'm not really living it.”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스페인 팜플로나로 투우여행을 떠났고, 삶과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그곳에서 삶을 발견했다. 전적으로 사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고, 헤밍웨이의 신조이며, 그는 그렇게 살았다. 독자들도 어디론가 가고자하는 욕망에 자신을 던짐으로써 전적으로 살아보라고 촉구한 소설이다.
구글지도를 열면 세계 모든 곳이 다 보인다. 특히 구글어스를 켜면 그곳에 대해 현지인보다 더 많은 지리정보를 알게 된다. 사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지리를 머릿속에 넣고 떠나자.
그러나 열망하는 곳이 없다면 백날 지도 열어봐야 소용이 없다. 친구와 얘기하다가, 영화나 책을 보다가 열망이 일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자료를 뒤적여 열망을 증폭시켜야 한다. 그러면 권태의 자리에 가슴 뛰는 시간들이 찾아와 일상을 바꿔놓는다. 여행의 전과 후까지 모두 여행으로 채워진다.
어떤 효과가 있을까? 익숙하던 삶이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일상의 베일에 가려 있던 사물의 진상이 보이고, 인생은 영화가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낯섦’ 효과라는 게 바로 그것이고, 여행이 그 효과의 최고봉이다.
여행 후. 우리는 진정한 지식을 얻게 된다. 영상화된 지식, 입체적인 지식. 알던 것을 공중에 띄워놓고 360도 회전시키면서 볼 때 얻게 되는 지식 말이다. 그때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인생을 전적으로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누가 침범할 수도, 뺏어갈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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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효과 ▲돈을 더 벌게 된다 ▲하는 일에 의미가 생긴다 ▲사람이 대범해진다 ▲전적인 삶을 사는 것이 눈에 잡힌다 ▲더 살고 싶어진다. ▲놀랄 만큼 장수를 누리게 된다(※여행의 수명연장 효과에 대해서는 다음에 피력)
그 모든 효과는 전적으로 욕망에 달려 있다. 반드시 그곳에 가고자 하는 욕망.
“나는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거야. 그럴 이유가 있으니까.”
(사진) 지난 주 내 작업실에서. ※다음엔 뉴올리언즈, 내슈빌과 함께 미국 대중음악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로큰롤 성지 – 멤피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