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손들에게 남겼다는 훈요십조중 차현, 공주강 이남은 지금의 호남지방이 아니고 말그대로 공주강과 차현바로 인근의 어느 특정지역을 말합니다.
고려건국에 끝까지 저항한 세력이 있던 지금의 충청도 공주강,차현인근 지역이었습니다. 왕건을 이어 고려 2대임금인 혜종은 왕건과 나주(羅州)출신의 장화왕후 오씨(吳氏)사이에 태어났습니다.
많은 왕건의 아들중 나주출신의 장화왕후와 사이에서난 아들이 2대임금이 된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다툴때, 지금의 전남 나주의 오다련을 비롯한 이지역사람들이 견훤보다 왕건에게 적극 협력했기때문이었습니다.
고려 건국시 많은 도움과 지원을 해주었기에 왕건은 이지역 춣신 오다련의 딸을 제1왕비로 삼고 그사이에서 난 아들을 2대임금으로 등극시켰던것입니다.
고려초-중기 거란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고려 현종은 전남 나주로 몽진(피난)을 갑니다. 이것은 고려왕실이 가장 믿는 지역이기에 그랬던것입니다. 또 고려 태조를 도운 왕사, 국사(國篩) 도선(道詵)국사는 전남 영암출신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에 (if 若)호남이 없으면 곧 국가는 없는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7년동안 이순신장군의 주요참모, 전라수군은 거의 호남사람들이었습니다.
행주대첩은 전라감사 권율장군이 전라도군사 3천명을 이끌고 서울수복에 나섰다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의 행주산성에서 거둔 승리였습니다. 행주대첩후 명나라 이여송제독은 임금 선조에게 "이번에 전라도 군사들이 잘싸워 승전했는데 경하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장전이씨, 창평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의 입향조이신 추성수 이서(李緖)공처럼 조선전기,중기,후기때 정치적이유, 처가고향으로의 이주, 기타 여러사유로 서울(한양),경기,충청지역등에서 살던 사대부들이 호남으로 입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서 김인후의 울산김씨(서울->장성입향), 고봉 기대승의 행주기씨(경기고양-> 광주), 눌제 박상의 충주박씨 (충남 대전->광주), ....
우암 송시열선생은 하서 김인후 선생을 가르켜 "하늘이 우리 동방(조선)을 도와 김인후 선생을 보내주셨다라고햇고,
조선후기 학자 군주인 정조임금은 조선조에 수많은 학자들이 있지만 도학(성리학)과 절의(節義)와 문장을 모구 갖춘이는 오직 (전라도출신) 하서 김인후 한사람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김인후 선생은 장성출신으로 퇴계이황과 친구이기도 했고, 석전 이최선선생이나 호남유림이 존경하고 그학문을 승계했던 분이었습니다.
창평 입향조이신 추성수 이서공의 처갓집은 인근의 전북 순창군이었습니다. 순창의 신평송씨(新平 宋氏)집안이었습니다. 서울 한양의 양녕대군의 손자인 이산부정 이사성공은 전라도 순창의 명문 신평송씨와 혼사를 맺어 그의 막내아들 이서(李緖)를 순창의 신평송씨집안 따님에게 장가를 보냈던것입니다.
- 현대역사에서 호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근원, 연원(淵源)은 일제시대때부터입니다. 조선시대 호남은 전주이씨의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어느지역보다 조선왕실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일제침략시 의병이 가장 많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직전에 조선내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세력을 진압하는데 이것을 "남한(남조선) 대토벌작전"이라고하는데, 말이 남한(남조선)이지 실제 당시 일본군의 작전요강,지도를 보면 거의가 호남(전라도)지역 의병세력이었습니다.
일제는 1907년~1910년사이 호남지역의 의병세력을 진압하고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하는데, 일제는 일본에 끝까지 저항,항거한 호남을 기억했고 경계하는 여러 시책을 일제시대 내내 펼칩니다.
여기에 해방되고 박정희정권은 1971년 신민당후보 김대중에게 대통령선거에서 실제는 패했지만 부정선거로 당선되고 1972년 유신으로 다시는 직접대통령선거를 폐지합니다. 정상적인 선거로는 도저히 집권할 수 없는것을 1971년 대선에서 알게되었기때문입니다. 이후 1970년대를 거쳐 전두환정권을 거치면서 이렇게 되었던것입니다.
이한기박사님이 1960년대 어느날 연구실을 찿은 제자들앞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셨다고 하는데, 이한기박사님은 늘 자신의 고향이고 선대의 고향인 호남을 사랑하고 늘 그렸던 그런 자랑스러운 호남인이셨습니다.
호남이 소하님이 생각하시는 수구세력들에게 비난,차별의 대상이된것은 일제시대를 거치며-박정희정권-전두환시대의 유물(遺物)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제 서서히 소멸(消滅)되어 갈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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