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담양천년 특별기획Ⅲ / 담양의 마을(1)-창평 장전마을

장전 2017. 5. 17. 11:09



죽림병풍 둘러싸여 대대로 名士 배출한 명당, 명품 마을
양녕대군 11대손 정착 이래 名文家 장전이씨 집성촌 이뤄
선각자 석전 이최선, 이승기 박사(비날론 발명), 이한기 총리 배출
후손 20여명이 학자, 정득규·김영인 前전남대총장의 처가(妻家) 마을


* 장전마을 전경

 담양뉴스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으로 <담양의 인물> <담양의 마을탐방> <추억의 우리동네> <담양의 근대건축물> <담양, 꼭 알아야할 100가지> 등 '담양 알기'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2018 담양천년 특별기획 IⅢ' ‘담양의 마을탐방-창평 장화리 장전마을’을 게재합니다.


< 담양의 마을탐방> 편에서는 기개와 충절이 넘치는 선비의 고장 담양의 정신과 뿌리, 그리고 담양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의향(義鄕), 예향(藝鄕), 문향(文鄕)의 고장 담양의 마을을 찾아 답사하고 지면에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담양은 기개와 충절이 넘치는 선비의 고장”

사람은 나고 자란 곳의 자연지리와 생태를 닮는 법.
온화하고 인정이 많은 담양인 들의 성품이 형성된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 이며 곳곳에 누정이 들어서고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단을 형성했던 것도 담양의 빼어난 풍광과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경치가 좋고 물자가 풍부하니 풍류가 발달하고 문화가 융성해지면 사람들의 성정이 여유롭고 넉넉해 질 수 밖에 없었던 담양, 담양 고을이다.


인문,사회적 상황을 볼 때 우리 담양은 기개와 충절이 넘치는 선비의 고장, 또는 의향(義鄕), 예향(藝鄕), 문향(文鄕)의 고장 이라고 한다. 유사 이래 대대로 이어져 온 대쪽 같은 담양인의 성품과 충의의 정신, 의(義)를 알고 예(禮)를 실천하며 시문을 꽃피웠던 옛 선조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담양,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고향이다.

이러한 인문, 사회적 그리고 지리적 생태환경 속에서 가장 담양다운 마을이 있으니 바로 창평면 장화리 장전(長田) 마을이다.


고작 30여 가구에 불과한 이 작은 농촌마을에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으니 실로 장화리 장전마을은 터로 따지면 ‘명당(明堂)’ 이요 인재로 따지면 ‘명사(名士)’의 마을이다.


장전마을은 쭉쭉 뻗은 죽림과 송림이 마을의 3면을 둘러싸 안은 채 마을 앞 들녘 가장자리를 실개천이 흐르고 멀리 靈山 서석산(무등산)이 우뚝 서 바라다 보이는 관내 보기드문 명당마을이다. 名文家 장전이씨 위주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500년 마을의 역사속에 대대로 국난극복에 앞장 선 정충신 장군, 허익복 장군을 비롯 조선말 선각자 석전 이최선, 근,현대기의 이승기 박사, 이한기 총리를 배출한 것을 비롯 현재에 이르러서도 20여명의 의사와 박사, 교수, 관료 등을 배출한 인재의 요람이자 명사(名士)의 마을이다.

“충신, 선각자 비롯 총리,군수,의사,박사,교수 20여명 배출”


■ 장전마을은....
기록에 의하면, 장전마을은 조선말 창평군 가면에 속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전마을과 장산마을, 연화촌의 각 일부와 대면의 화양촌, 가흥동 일부를 합해 장전과 화양의 이름을 따서 장화리로 정하고 담양군 창평면에 편입됐다.
마을 번성기에는 한때 80-90호가 넘는 주민들이 살았지만 현재는 30세대 내외의 소담한 마을로 자리하고 있으며 장전이씨 가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은 죽림과 송림으로 이루어진 뒷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풍치와 지세가 워낙 좋아 예로부터 걸출한 인물과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기록에 의하면, 명종 15년(1560년) 금성나씨 위규가 대덕면 장산리에서 이주해 와 처음 터를 잡기 시작했으나 그 후 전주이씨들이 입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입구부터 좁고 긴 밭이 길게 이어져 있어 긴밭 즉, 장전(長田) 이라 했으며 진밭골(진매) 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진밭골로 부르면 큰 인물이 못 난다하여 한 스님의 조언에 따라 장전마을로 부르게 했으며 그래서인지 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을 거치는 동안 국난극복에 일임한 정충신 장군, 월양공 허익복 장군 등 걸출한 인물들이 났다.


장전마을은 대나무로 짠 소쿠리 형국으로 남쪽은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게 활짝 열려있고 마을 앞은 영산인 서석산이 멀리 바라보이며 마을 안 북쪽 중심을 따라 전주이씨 고택(장전이씨 고택)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


전주이씨 양녕대군 후손 추성수 이서가 중종때 창평으로 유배왔다가 10년만에 풀려나 그대로 눌러 앉은 뒤 11대손 위정공이 1682년에 대덕면 매곡에서 분가해 이 마을에 정착했다. 이런 내력 탓에 이곳 장전이씨들은 벼슬을 멀리하면서 오로지 학문을 닦는데 힘을 기울였고 해방이전에는 ‘학사촌’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작은 농촌마을에 방학때면 학사모를 쓴 대학생 여럿이 마을로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탓인지 대대로 자손들이 학문으로 번창해 조선말 외세의 침략에 항거한 선각자 석전 이최선 선생, 세계 최초로 비날론을 발명한 대한민국 공학박사 1호 이승기 박사, 서울약대의 전신인 조선약학원 출신 전남 약사면허 1호 이정기 박사,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한기 박사(前서울대 법대학장, 학술원 회원), 이진기 박사(前전남대 의대학장, 학술원 회원) 등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참고=석전 이최선, 이승기 박사, 기당 이한기 총리는 ‘담양의 인물’ 편에서 별도로 다룰 예정임)


이밖에도 이 마을 장전이씨 가운데 한 가문인 이방기 교수(前전남대 법대학장)와 이종원 교수(전남대 의대), 이종걸 교수(한국외대 경제학과), 이종빈 교수(전남대 생물학과), 이문기 교수(전남대 의대) 등이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이 가문으로 장가 온 名士로는 전남대 총장을 지낸 정득규, 김영인 교수, 국회의원을 지낸 김태규 의원이 있으며,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前대표는 외손자로 알려졌다.

■ 대대로 명문가 이어온 장전이씨 名士들의 생가와 유적 현존
장전마을은 초입부터 고풍스런 옛 한옥이 줄줄이 눈에 들어오면서 사뭇 비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을회관을 지나 마을 안길로 잠시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풍채 좋은 고래등 같은 옛 기와집이 선뜻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서울법대 학장과 감사원장,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기당(箕堂) 이한기 박사의 생가 영서당(迎瑞堂) 이다.


* 영서당-이한기 박사 생가


●영서당(迎瑞堂)
영서당은 이한기 총리의 생가 이기도 하지만 고조부인 석전 이최선 선생(1825-1883)이 나고 자란 곳이다. 석전 이최선은 노사 기정진의 제자로 이곳에서 성장하여 조선말 외세배격을 위한 위정척사 운동에 앞장선 선각자이다. 석전 선생의 아들 청고 이승학(1857-1928)도 송사 기우만의 문화에서 수학했으며 장성의병을 이끌던 스승 기우만과 의병활동을 펼쳤고 이승학의 아들 옥산 이광수(1873-1953)는 구한말 통훈대부 성균관 박사를 지냈고 을사오적 암살에 나섰다가 사전발각 돼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이광수의 아들은 초대 전남대 문리대학장을 지낸 역사학자 이혁 박사(1897-1977)이며 이 분의 아들이 바로 이한기 총리(1917-1995)이다.


이처럼 석전의 자손들은 대대로 구국과 외세 배척에 몸을 바친 애국자 이자 학자의 집안 이었다. 이한기 총리는 바로 석전 선생의 고손으로 이곳 장전마을 영서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유년기를 보내고 후에 학계와 법조계는 물론 고위 관료로써도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인물로 성장한다.


* 전남 약사면허 1호 이정기 박사 본가


●전남 약사면허 1호 이정기 박사 고택
기당 이한기 박사의 생가 영서당을 뒤로 하고 조금 더 마을 윗길로 올라서면 왼편에 또 다른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고택 또한 장전이씨 명문가 중 하나로 전라남도 약사면허 1호 이정기 박사의 본가이다. 


이정기 박사는 자녀와 후손들이 대부분 의사, 교수로 성장해 이 마을 장전이씨 일가 중 가장 많은 의사와 박사를 배출한 가문이 됐다.  이 박사의 아들은 관선시대 담양군수, 여천시장 등을 지냈고 셋째사위는 전남대학교 제12대 총장을 역임한 김영인 박사이다.


●이승기 박사 생가(전남 민속자료 제41호 장전이씨 고택)
이 마을에서 가장 고즈넉하고 옛 스러운 기품이 더욱 묻어나는 고택이 바로 대한민국 공학박사 1호이자 세계 최초로 비날론을 발명한 이승기 박사(1905-1996)의 생가이다.
이정기 박사 고택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이승기 박사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 별채가 아직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1호로 지정됐다.


* 이승기 박사 생가(사랑채)

 마당에는 얼마전 담양군이 보호수로 지정한 150년 된 와송이 주인을 닮은 듯 기품을 자랑하고 있다. 이 와송 옆에는 조선시대 양반가 전통양식의 장방형 작은 연지(연못)이 자리하고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붙잡고 있다.


이 박사는 6.25당시 월북, 석탄을 원료로한 화학섬유 비날론을 발명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북한 영변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을 지내는 등 북한의 1세대 핵과학자로 영웅대접을 받았다. 비록 월북했지만 국내에서도 워낙 유명했던 공학자이자 과학자인 탓에 그의 생가에는 지금도 답사와 방문을 위해 전국에서 찾는 이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한기 총리는 이승기 박사의 6촌 동생이다.


* 이승기 박사의 생가(안채)


●문일정(聞日亭)
문일정은 석전 이최선의 부친 이규형(양녕대군 15세손)이 강학하던 곳으로 동문수학 벗인 기사 노정진을 마을로 초대해 동네 어귀의 이곳 문일정에서 자주 강회를 열고 배움과 함께 당시의 시대상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문일정은 당초 장전이씨 문중에서 일가의 교육장소로 쓰기 위해 사우계를 조직해 文房四友에서 따온 ‘四友亭’ 이라 했으나 후일 노사 기정진이 정자이름을 ‘문일정(聞日亭)’으로 개명했다는 글이 ‘문일정기’에 적혀있다.


그 뜻은 바로 “하나를 듣고도 열을 아는(문일지십)’ 선비라면, ‘하나를 듣고도 그치지 않아야 한다(문일이부지)’는 뜻에서 문일정 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 문일정은 기사 노정진과 석전 이최선을 비롯 그의 장남 청고 이승학, 손자 옥산 이광수 등이 외세배척과 위정척사 운동을 벌이는 한편 근대 교육운동에 힘써 온 한말 애국운동의 산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장광호 국장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