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주변에는 선조들이 무엇인가 자신을 나타내 후손에게 알리려는 방법중에 한 곳 정자들이 산재하고 있다. 대부분 목조건축물로 오랜기간 유지가 어려움에도 정자를 지어냈다. 비바람이 불면 정자내에 보존에 치명적인 영향이 끼치지만 정자의 후손이나 각 기관에서는 많은 시간과 금전을 들여 보존에 힘쓰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의 정자는 그 인물에 묘지나 전각에서 머물러 있기는 난해하니 아예 쉴곳을 제공하면서 정자의 인물과 그에 관련한 인물들의 흔적들을 남겨 잠시나마 좋은 시간을 갖게하기 위함이였다고 여겨진다.
담양군 창평면에서 읍쪽으로 2km 정도 길을 따라가면 좌측 멀리 낮으막한 야산에 노송 군락을 이루는 자리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장화리 389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문일정(聞一亭),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초라한, 그러나 정자의 자태는 송림에 묻혀 그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전주이씨 이치고(李穉固)의 강학소로서 그의 아들 최선(最善1825~1883)에 의해 1861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내에는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일정기(聞一亭記)가 있을 뿐, 그밖의 이곳에는 다른 현판은 남아 있지 않다.
기정진 쓴 문일정기에 의하면 기정진과 이치고는 친구로서 생전에는 이 정자가 없었는데 1859에 치고의 큰 아들 석전 이최선(石田 李最善)과 귀선이 한 마을에서 벼슬에 올라 그 후 2년이 지난 1861년에 이 정자가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는 낙유樂裕이고, 호는 석전石田 또는 석전경인石田耕人이다. 1825년(순조 25) 4월 17일에 담양 장전면(현 창평면 장화리)에서 양녕대군의 15세손인 아버지 규형(奎亨)과 상산김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최선은 어려서 영민하여 3세에 글을 알았고, 5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아 어른들이 운자韻字를 들어주면 마치 미리 지어놓은 듯이 응답할 정도였다. 항상 어른들 곁에서 의심나는 점을 물어 지혜를 길렀고, 12~13세 때에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다. 그는 15세(1839)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노사 기정진(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자내에 문일정 정기 현판이 걸려있다.
그는 17세에 어머니를, 27세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어 스승인 기정진에게 더욱 의지하면서 철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기정진의 문인이 된 이최선은 정성을 다하여 40여 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노사문하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그는 학문은 물론이고 현실에 대한 감각과 실천에 있어서도 기정진의 사상을 계승하며 발전시켰다. 또한 이최선은 노사문하에 있으면서 행의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35세(1859, 철종 10)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다.
이최선과 귀선(龜善)이 한마을에서 진사가 된 것을 계기로 2년 후(1861년) 정자가 건립되었다. 정자의 명칭이 문일정으로 된 것은 정자가 완성되었으나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기정진이 견일정(見一亭)과 문일정 가운데 문일정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50세(1874, 고종 11)의 늦은 나이에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열린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응시했으나 초시에 불합격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한강을 건너면서 몸에 지닌 은장도와 옥거울을 물에 던지고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였다.
최치원의 시 ‘대 지팡이는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보내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 無出山步 筆絶入京書)’와 두보의 시 ‘돌밭 띠풀집은 푸른 이끼로 황량한데, 다만 원컨대 남은 생애 밥이나 배불리 먹었으면 한다(石田茅屋荒蒼笞 但願殘年飽喫飯)’를 고향 집에 붙여두고 이최선은 더 이상 관직에 뜻을 포기하고 향촌에 은둔하면서 어지러운 세상과 등지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살 것을 선택하였다.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침입한 병인양요 때에는 종친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의계(同義契)를 조직하고 의병을 구암땅으로 모은 뒤 강화도로 향하였다. 이때 기정진과 이최선이 보여주는 스승과 제자의 돈독한 정은 이최선이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할 때 전해 준 시 한 수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최선이 '강화도로 향하여'라는 시가 그의 심정이 남아 있다.
금성의 가을빛 이별 노래 드리우고/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종성宗姓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빗기는 경과 휘두르는 창 어느 것이 더한지
金城秋色入離歌 持贈長鞭奈老何 宗姓宜爲編戶倡 橫經孰與揮戈多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 뿐이니/ 남아男兒가 어이 푸른 도롱이 입고 누워만 있으니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한수가 잠잠해 파도 없다 전해주오 但看日月麗黃道 焉有男兒臥綠蓑 客裏若逢賓雁翮 爲傳漢水精無波
이에 이최선은 무사히 돌아올 것을 바라는 스승 기정진에게 답 시를 읊는다.
스산한 서풍에 칼을 잡고 크게 노래하니/ 창황은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쾌히 죽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 仗劒西風一放歌 蒼黃時事奈如何 臨危成敗非吾度 快死南兒問幾多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是日方承催血詔 晩天容易脫漁蓑 師門贈別慇懃意 歸泊江都誓一波
이때 비록 도착하였을 때는 프랑스군이 퇴각한 후였지만 성이 수복되었다는 보고에 기쁘기도 하였지만 후일 또 다른 침략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을 만나 인재들 얻는 일과 독서를 하는 일에 힘써 백성의 마음에 광명과 화합을 심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1862년에 지방의 수령과 이서들의 탐학으로 인하여 일어났던 임술농민항쟁 때에 「삼정책三政策」을 상소하였다.
이최선은 삼정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기강의 쇄신으로 염치를 일깨워 힘써 실행하게 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올바른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이치를 밝히는 ‘도학에 힘쓰고[勉道學], 언로를 개방하며[開言路], 인재의 선발을 엄정하게 해야 한다[嚴科程]’고 하였다. 이최선은 사상은 성리학적으로는 기정진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기정진의 사상이 담긴 「외필(猥筆)」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필(讀猥筆)」을 써서 인간 본성 속의 이(理)를 절대적 가치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우가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였을 때 옹호하였다.
기정진의 사상은 주리론主理論 사상에서도 독특한 유리론唯理論으로 리와 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적인 사상이 아니라 리와 기를 하나로 보는 일원적인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유리론 사상은 이최선의 「삼정책」과 의병활동에서 모두 리를 근본으로 하는 행동양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특히 이필선이 사는 세대 조선 후기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한 변화가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조선봉건사회의 구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보수․봉건적인 입장이었지만, 백성 위주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모든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기정진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고, 또한 학문에 대한 실천적 행동양식의 근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혹세무민의 세도정치와 이로 인한 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유민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서양의 진출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거쳐 병자수호조약(1876)에 의한 강제적인 개항으로 독선적이고 변태적인 세도정치와 구미열강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인 조정의 무능함이 만연되었을 때 지역 유생들의 개탄과 구국의 대안들이 전국에서 상소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었던 지방의 향리 석전 이최선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위태로운 국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해소하기 위해 1862년 그의 나이 38세 때에 『삼정책』을 지어 “기강의 해이와 염치의 상실은 삼정의 폐단보다 더욱 심하다”고 역설하였으나 담양부사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삼정책』을 본 노사 기정진 선생은 그의 경륜이 주도면밀하고 재능이 우수하여 세상에 쓰일만 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외세를 철저하게 배격해 척사위정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에서는 삼정의 문란은 지방 수령의 각성과 그 실천에 부족함이 있고, 근본적인 문제는 예의염치가 없는데 그 원인이 있으므로 양심의 회복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일정에서 이최선과 그의 아들 승학과 손자 광수가 책을 읽고 학문을 하며 세상의 돌아감을 보고 들으며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실척적인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들인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1857~1928)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을사조약 이후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에 가담하였고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의거한 인물이었다. 성균관의 박사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1873~1953)는 이기李沂․윤주찬尹柱瓚․민형식閔衡植 등과 함께 자신회라는 조직에 가담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같이 이최선의 실천론은 3대에 걸쳐 구국의병활동으로 이어져 오늘에까지도 우리들의 본이 되고 있고 그래서 문일정은 한말 애국운동의 산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때마침 마을 어른 세분이 피서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어른들의 말을 의하면 창평면 장화리는 태종의 큰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예들이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문일정 입구 바위에는 "왕실세좌(王室世座)"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문구는 이최선의 가문이 담양에 거주하게 된 연유에서 비롯 된다.
양녕대군의 증손인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가 전라도로 귀양을 왔기 때문이었다. 1507년(중종 2) 8월 26일에 대사성 이과(李顆),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 병조정랑 윤귀수(尹龜壽), 내금위패두 김잠(金岑), 손유(孫洧) 등이 중종을 몰아내고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려다 서얼인 노영손(盧永孫)의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과․이찬․손유는 능지처사 당하고, 이찬의 형인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은 경상도 초계로, 동생인 이서(李緖)는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 이서는 유배된 지 14년만에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귀경하지 않고 대곡면大谷面 등갈리藤葛里에 머물었고, 그후 이최선의 6대조인 이형정李衡井이 지금의 장전마을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들은 장전이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에 경중을 따지기 보다는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 후손들이 취할 도리가 아닐까?
이렇게 이최선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고, 향촌 유림으로서 은둔과 출사의 뜻을 가진 전형적인 선비로 살다가 1883년(고종 20)에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지금 장전마을에는 이최선이 책을 읽던 문일정과 영서당迎瑞堂이 남아있다. 장성의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고 전한다.
김은희 기자/ nox91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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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매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