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竹(묵죽)
-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 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아침에 화투 패 떼며 운세를 보듯 나는 시를 읽는다.
하루라도 시를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군내가 도는듯 하던 날들에 생긴 버릇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문학적이지 않다.
어느날엔가부터 소설을 읽어내기가 버겁다.
소설 문장의 말랑거림, 머나먼 우회의 과정들이 견디기 힘겨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버릇처럼 시를 읽는다.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치듯
내가 살아지는 동안엔 여전히 길고 긴 묵죽 같은 흔적을 남기며 시를 읽을 것이다.
꼭 그만큼씩만...
詩가 내 곁에 머물러주길...
- 바람구두 연방님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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