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과 오기호는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거사를 도모하고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김인식(金寅植)·김영채(金永采)·이광수(李光秀)·이용태(李容泰) 등이 협조해 경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기(李沂), 윤주찬(尹柱讚) 등도 가담해 자신회를 조직하였다.
이기는 자신회의 취지서를 짓고, 나인영은 애국가와 동맹서를, 윤주찬과 이광수는 정부와 일본정부, 통감부, 일본군 사령부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공문과 포고문 작성을 담당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취지서와 포고문은 독립의 의지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천명하였다. 거사는 원래 2월 13일로 계획되었으나 몇 차례 연기되어 3월 25일에야 실행되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궁궐 앞 길목을 지키다가 이완용 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이홍래, 강원상 등의 결사대가 사동(寺洞) 입구에서 군부대신 권중현을 공격해 부상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들의 거사는 비록 실패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알려지게 되고, 국민들은 크게 놀랐고 민족의식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나인영 등은 재차 거사를 도모했으나 사전에 계획이 노출되어 관련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이에 나인영과 오기호는 거사의 정당성을 담은 자현장(自現狀)을 가지고 평리원(平理院)에 나아가 자수해 자신회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이 사건과 관련된 30여명은 최고 10년에서 5년의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지도(智島), 진도(珍島), 철도(鐵島) 등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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