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은 벼슬살이를 하고 나서 물러나면 자신이 나고 자랐으며, 조상들의 묘소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퇴계 이황李滉선생, 서애 류성룡柳成龍선생도 조선 선조宣祖 연간에 벼슬에서 물러나고 고향인 경상도 안동으로 돌아왔고 율곡 이이李珥선생도 고향 황해도 해주 가까운 경기도 파주 율곡리栗谷里로 돌아왔습니다.
1917년생으로 지난 1995년에 작고한 전 국무총리이고 서울대 교수시절 세계적인 국제법학자였으며 감사원장(1981-1982)을 역임한 기당箕堂이 한기李 漢基박사는 전라남도 담양군 출신입니다.
그는 1995년 작고한후 고향인 전남 담양군 장전부락 선영에 잠들어있습니다. 제가 지난 2004년 12월에 가보니 이한기박사묘는 바로옆에 초대 전남대 문리대 학장을 지낸 역사학자 아버지 이혁李爀공, 대한제국말 통훈대부通訓大夫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인 할아버지 이광수李 光秀공묘소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한기박사는 생전에도 자주 고향에 내려왔고 오랜기간 주생활 근거지가 서울이었음에도 살아생전에도 고향을 틈나는데로 자주 찿고 돌아가신뒤에는 아버지,할아버지옆에 잠들어계십니다. 또 첫부인이고 사별한 서산류씨瑞山柳氏부인 묘와 합장合葬되어있었습니다. 진정으로 고향과 조상을 존경하고 사랑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한기 박사의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선생의 후손인 해남윤씨海南尹氏부인입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의 어머니도 윤선도 선생의 후손인 해남윤씨부인입니다. 윤선도 선생은 조선광해군~숙종때 인물로 남인(南人)의 대표적 지도자이고, 집권당인 서인 노론(老論)의 영수이자, 이념적 지도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등과 목숨을건 예송논쟁禮訟論爭을 벌인 인물입니다.>
이한기박사 고향 진밭골 가는길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1구 (장전마을,진밭골) 마을 입구
안내표지판 위로 보이는 이승기길.... 한국이 낳은 세계적 과학자 이한기박사의 육촌형 이승기박사의
이름을 따서 담양군이 명명한 마을어귀 길.
이한기박사가 타계하시기 약 2년여전인 1993년 3월경 직접지은 고향사랑의 절절함이 뭍어나는
자작시(自作詩)----
무등산 떠도는 구름을 보며 영서당(迎瑞堂) 뜰에서 뛰놀던 아이
고향 떠나 한평생 유랑이었네 방황이었네 고난이었네
덧없는 세월 속에 흰머리 이고 진밭골 찾아오니 청산이 반겨주네 *진밭 : 긴밭 ,이한기 박사의 고향인 담양 장전부락이
장전(長田):우리말로 긴밭인데 전라도 방언으로 길다,
긴을 진라고 발음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들
이곳에 다 모여 있어라 내 못다한 사랑 길이 길이 바치고져 이 한기 作 (나의 묘비명)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이한기박사님 묘소 입구에 세워진 나의 묘비명 친필석.
#.평생을 고향(조상,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이한기 박사의 마음이 간절히 묻어나고 느껴집니다.
영서당은 이한기박사의 생가인데, 영서당의 영은 맞을영(迎) 상서로울서(瑞),집당(堂).
영서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무등산(無等山)의 또 다른이름이 서석산(瑞石山)입니다.
-동방의 으뜸 무등산의 상서로운 기운을 맞이한다는 의미입니다.-
무등산의 좋은 기운을 받는 집. 이런뜻인거 같습니다.
영서당 대문
맞을영(迎) 상서로울서,서석산(무등산) 서(瑞) 집당(堂)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광주광역시(光州)에서 승용차로 약 20분거리 소재.
이한기박사 부친(이혁공) 묘소 위쪽에서 바라본 장전마을(진밭골) 전경(全景)일부. 사진 우측쪽이 영서당과 마주보고 서있는 무등산(서석산)이 있다. 사진 좌측이 영서당있는쪽.
"덧없는 세월 속에 흰머리 이고 진밭골 찾아오니 청산이 반겨주네" 청산=마을 주변의 산과 들,자연
무등산 정상에서 바라본 담양방면
동방의 명산 무등산 정상 가는길에 있는 무등산의 상징 서석대(瑞石臺) 무등산=서석산(瑞石山)
담양쪽에서바라본 운무(雲霧)에 쌓인 무등산
가족(아내,아들)과 찿은 영서당
장전마을,이한기박사묘소가는길
이한기박사 묘소 동영상
그가 일제시대 서울 휘문고를 다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옥에 갖히자 고향 담양에서 성균관 박사(成均館)박사(博士)를 지냈던 할아버지(이광수)가 서울까지 찿아와 손자인 이한기 박사를 걱정하고 노심초사하셨다고 예전에 글에서 보았습니다. 아버지,할아버지의 정이란 이런것입니다. 돌아가셔서도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조상님,고향산하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한기 박사는 개인적으로 보면 지난 1987년 저의 직계조이신 회산공 할아버지의 고손이신 지족당 박성인장군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쎴습니다.
바로 그 이한기박사가 태어나고 자라서 돌아가신뒤 묻힌 전남 담양에 언제부터 그의 조상님들이 세거世居(대를 이어 살아옴)하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한기박사는 조선왕실의 즉 조선3대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장형인 양녕대군의 후손입니다.
즉 전주이씨 양녕대군파(全州李氏 讓寧大君派)이지요.
그럼 언제부터 양녕대군의 자손이 호남 담양에 살게되었을까요?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처음으로 전남 담양에 거주하게된분은 양녕대군의 증손자인 이 서(李 緖)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양녕대군의 큰아들인 순성군(順城君)의 4남인 이산부정(伊山副正) 이사성(李 嗣成)의 3남으로 서울(한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나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중 그가 26세되던해 1507년(중종2년)에 일어난 이과(
李顆)의 옥사가 있게됩니다.
담양입향조가 되는 이서(李緖)는 당시의 주상인 중종中宗임금의 이복형제이자 前王 성종成宗임금의 아들인 견성군 이돈을 추대하고 중종임금을 제거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에 큰형인 진성수 이면, 중형인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등 3형제가 연루되었다하여 옥에 갖히는등 큰 고초를 겪게됩니다.
이로인해 이한기 박사의 직계조이자 담양입향조가 되는 이서(李 緖)는 큰형인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과 함께 유배를 떠나게됩니다. 큰형인 이면은 경상남도 초계로 이서는 전남 담양으로 가게됩니다.
<조선왕조실록 관련기사>
중종실록12권, 중종5년(1510 경오 / 명 정덕(正德) 5년) 12월 12일(갑오) 4번째기사
산령 이윤·추성수 이서 등의 죄를 감등하여 부처할 것을 명하다
이보다 앞서, 의산령(義山令)이윤(李潤)은 해남(海南)에 유배(流配)하고, 추성수(秋城守)이서(李緖)는 창평(昌平)에 정속(定屬)하고,진성수(珍城守)이면(李綿)은초계(草溪)에 정속하고, 헌양정(巚陽正)이사조(李嗣祖)는 영천(榮川)에 안치(安置)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죄다 정속(定屬)을 해제하고 모두 부처(付處)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과(李顆)의 어미 철비(鐵非)를 공신의 집에 비(婢)로 주지 말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4책 482면
사건에 연루된 이서의 둘째형 하원수 이찬은 죽음을 맞습니다.
추성수(秋城守) 이서(李 緖)공은 담양에 온지 14년되던 해 이과의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져 유배에서 해제되었으나, 그는 서울(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담양의 산천과 인심이 좋아 여생을 보내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기릅니다. 이것이 이한기박사의 일가가 본래 서울사람에서 호남인이 된 계기입니다.
나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함양박씨1파 동정공파중 수화(遂和)공의 차남인 월영당 이홍(以洪)선생의 자손들이 전남 당양 창평일대에 거주하는데 바로 이 전주이씨 양녕대군후 추성수 이서공파의 집안들과 혼인하고 교류했다고 합니다.
보성의 함양박씨 회산공후손들이 보성의 광주이씨(廣州李氏),죽산안씨(竹山安氏)등과 교류했듯,담양내에서 서로 비슷한 지체의 집안들끼리 따님을 데려와 며느리로 삼고 또 따님들을 시집보내 그 집안의 며느리로 삼았지요. 이한기박사의 할머니는 죽산안씨(竹山安氏)부인이신데, 조선선조~인조대의 성리학자이자 율곡 이이(李珥), 우계 성혼(成渾)선생의 문인(門人)인 보성의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선생집안 따님입니다.
이한기 박사의 직계조에 우리 함양박씨 동정공파후 월영당 이홍가문의 따님이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지난2005년경 이한기박사의 6촌되시는 어른께 여쭈어보니 인근 함양박씨들과도 혼사가 있었다 하니, 혹시 이한기 박사의 몸속에도 우리 함양박씨의 피가 섞였을 수도 있겠지요^^.
1917년 세계적인 국제법학자이자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한 이한기,2대 서울공대학장으로 세계최초로 비날론을 발명한 이승기(李升基)박사 같은 후손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승기박사는 이한기박사의 재종간(再從間:6촌) 형님입니다.
이한기박사는 1969년 박정희대통령의 3선개헌에 맞서 당시 여느 대학들처럼 서울대생들도 3선반대데모를 했고 경찰과 충돌하였습니다. 이때 서울대법대 학장이던 이한기박사는 경찰이 쏘는 물대포를 맞아가며 또 울먹이며 농성중이던 학생들을 설득하고 경찰을 설득하여 학생들을 안전하게 해산,귀가시켰습니다.
국제법강의를 하면 비전공자들일지라도 알아들을수 있도록 쉽게 강의를 하셨다고 합니다.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양녕대군의 증손자 추성수 이서파)가 전남 담양에 세거(대를 이어 삶)하게된 연유입니다.
추성수(秋成守) 이서공(李緖公)의 재실(제사모시는 건물)인 몽한각은 조선순조대(1803년)에 같은 양녕대군파의 후손인 담양부사(潭陽府使) 이동야(李東野)와 창평현령(昌平縣令) 이훈징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습니다.
서울대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李壽成) 전총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6.25중 납북된 선친 이충영변호사와 이한기박사라면 이럴때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생각하며 고뇌했다고 합니다.
<이한기 박사 세계도世系圖>
고조부 이 안사(李 安社) : 태조 이성계의 4대조-전라도 전주에 시조 이한(李翰)이래로 대대로 거
주하다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이주
증조부 이 행리(李 行里)
조부 이 춘(李 椿)
부 이자춘(李 子春)
1. 이태조(李太祖 成桂) : 함경도 함흥 태생
2. 삼남 태종 이방원(李 芳遠)
3. 장남 양녕대군 이제(李褆), 차남효령대군 이보(李補), 충녕대군 이도李陶(세종대왕)
4. 장남 순성군(順城君)
5. 삼남 이산부정 이사성(李 嗣成)---배(配) 전북 순창출신 홍주송씨(洪州宋氏) 평(枰)의 따님.
이 승학(李 承鶴) -배(配) 반남박씨(潘南朴氏) 노사 기정진의 제자. 구한말 항일운동,유학자(儒學者)
(1857~1928)
이 광수(李 光秀)- 배(配) 죽산안씨(竹山安氏)부인 - 구한말(舊韓末) 항일(抗日)운동,성균관 박사
(1873~1953)
이 혁(李 爀)- 배(配) 해남윤씨(海南尹氏)부인 ----- 사학자,서예가, 초대 전남대 문리대학장
(1897~1977)
이 한기(李 漢基)-배(配) 서산류씨(瑞山柳氏)부인, 김혜경(金惠炅)
(1917~1995)
왕성한 학문활동을 하던 장년의 이한기박사
1980년 출범한 전두환정권은 정의(正義)사회 구현이라는 국정기조에 가장 적합한 올곳은 선비의 상(像)을지닌 이한기서울대 법대교수를 감사원장에 임명하였다.
감사원장 취임선서 장면(1981년) 사진 가운데는 당시 남덕우 국무총리
감사원장 임명 결재안.
1963년 9월5일 외교구락부에서 맨앞줄 왼쪽 네번째가 이한기박사 바로좌측이 이영섭 전 대법원장
책을 모으다보니 가난한 살림이 더욱 가난해졌다는 ...이한기박사
1970년 4월30일 매일경제 인터뷰기사
1974년 어느날 서울근교에 서울대교수진의 야유회에서 가운데와이셔츠차림이 이한기박사
맨좌측이 헌법학 김철수교수 다음이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교수. 이수성교수의 아버지 이충영 변호사는 경북칠곡태생으로 이한기박사와는 동경제국대학 법학과 선후배사이로 일제때 법관을 하고 6.25동란때 피난가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이수성 전총리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수성교수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맨먼저 이한기박사를 찿아가 "저의 아버님이 이자 충자 영자 (李忠榮)입니다." 하니 이한기박사가 "해방전 이선배한테 속아서 종로뒷골목에서 개고기를 노루고기로 알고 먹었지. 허허"그랬다고 합니다.^^ (이수성 전 총리 회고)
1969년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영토" 를 통해 독도와 만주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명쾌히 논증한 이한기박사. 서구에서 형성된 국제법을 한국적 시각으로체계화한 국제법학계의 태두였다.서울대법대교수로 재직중이던 56년과 58년 그가 펴낸 「국제법학(상)」과 「국제법학(하)」는 당시 국내법학교재로는 일본학자들이 유일하게 인용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특히 한일협정 직후인 60년대후반에 펴낸 「한국의 영토」라는 박사학위논문은 독도와 간도등이 한국의 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명쾌하게 갈파한 역저(力著)로 평가받고 있다.
1969년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추진에 서울대학생들의 거센 반대시위중 발생한 학생-경찰 충돌로 학교로
들어와 강경진압하려는 공권력(경찰)에 맞서, 농성중인 학생들에게 물벼락까지 맞고, 결사적으로 농성을 풀지않아 이들을 설득하다가 졸도. 입원까지 하고, 정부,경찰측을 설득하여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와 처벌방지를 위해 애쓰던 서울대 법대학장 이한기박사.
-오늘날 문제되고있는 학교폭력문제와 관련해 오늘을 사는 교사,교직원들이 본받아야할 스승의 책임있는 자세는 이한기박사의 모습에서 구했으면 한다. (필자 注) -당시 상황을 보도한 1969년 7월 3일자 경향신문 사회면
1990년 11월10일자 경향신문 인터뷰
1991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3면 정치면 실린기사 (1987년 6.29 당시를 회고하는 이한기박사)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대통령직선제 요구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정권은 청렴강직하고
국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이한기박사를 총리로 추대하여 민심을 수습하려하는데, 당시를 언급한 기사내용.
국민의 직선제요구와 박종철군사건으로 촉발된 1987년 6월시국을 군병력투입으로
진압하려던 전두환정권의 시도에 강력히 반대하고, 평화적해결을 촉구했다는 내용.
1987년 총리 재임시절
이재형 당시 국회의장 방문-같은 전주이씨 종친...
1987년 6.29 선언을 이끌어내고 7월초 이임하는 이한기박사-정든 삼청동 총리공관 직원들과 인사
지난 2001년 4월초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이한박사님 묘소 가까이 세워진 추모비 제막식 장면.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마을 입구
이한기박사의 고향인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에 세거해온 전주이씨 양녕대군후 추성수파중 장전부락거주 이한기박사 문중을 소개한 1994년 2월 6일자 한겨레신문.
2012년 2월12일(일) 오후방문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소재 이한기박사 묘소
묘비 : 대한민국 국무총리 기당 전주이공 한기 박사, 배(부인) 서산류씨 판례여사 지묘
지난 1984년 6월 전남대 총장에 임명된 이한기박사의 사위 고(故) 정 득규(丁 得圭) 총장이 당시 진의종 국무총리로 부터 총장 임명장을 받고 환담하는 모습.
멀리 바라다 보이는 이한기박사님의 고향 담양군 창평면 장전마을
장전마을 도로 맞은편 봄기운이 조금은 느껴진다.
도착한 몽한각 입구에 있는 표지판-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 표기로 됐다. 담양군의 관광정책 활성화 노력..
이한기박사님 생가가 있는 창평면 장화리, 창평초등학교 지나서 얼마 안가니 대덕면 매산리 소재 몽한각.
지난 1987년 몽한각 입구에 건립된 조선 종실(왕실) 추성공자(秋城公子) 유적비.
추성공 유적비 옆면에 이한기(漢基) 박사의 함자가 보인다.
추성수 이서공의 재실인 몽한각 올라가는길.
몽한각 입구
담양군 대덕면 몽한각(夢漢閣)과 이서의 낙지가(樂志歌)
남도누정 새로보기 - 19 담양 몽한각(夢漢閣) -전남일보 2009.
세속 버리고 안빈낙도의 삶 추구 왕손의 자손 '이서' 추모위해 후손이 건축 전남 가사문학 효시인 '낙지가' 썼던 공간
사방에 초록의 싱그러움이 춤을 춘다. 계절적으로 여름은 한참 멀었지만 대지를 박차고 나오는 새싹들과 나뭇가지 끝자락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민 새 잎들의 생명력 발현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우성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차량이 붐비는 도로에도 봄의 아지랑이가 슬그머니 마중을 나왔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한 낮의 풍경은 마치 꿈을 꾸듯 아련하고 몽롱하다.
광주에서 담양 고서, 창평을 거쳐 호남고속도로를 관통하는 대덕육교를 지나면 곧바로 대덕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사무소에서 바로 우회전해 200여m 들어가면 왼쪽에 350년 수령을 지닌 멋들어진 소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옆으로 눈을 돌려보면 한국전통의 향이 물씬 풍기는 고색창연한 옛집이 멀리 그려진다.
바로 몽한각(夢漢閣)이다. 정확한 주소는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17번지.
몽한각은 조선 시대 이서(李緖ㆍ1484∼)의 재실(齋室ㆍ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으려고 지은 집)이다.
이서는 태종(1401~1418)의 5세손이며 양녕대군의 증손으로 중종 2년(1507) 이과(李顆)의 왕위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로 담양 명양현(鳴陽縣 :지금의 대덕)에 유배되었다. 그 후 14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한 후 자유인이 되나 끝내 귀경하지 않고 담양의 산수와 벗하면서 일생을 마쳤던 인물.
훗날 양녕대군들의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휘 등이 이 지방에서 관직을 보내면서 오랫동안 이서 공의 재실이 없음을 알고, 순조 3년 (1803년)에 그를 추모하며 현재의 몽한각을 건축하였다. 매년 음력 7월 7일에는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몽한각의 유래는 유배시절 그가 남긴 시 구절의 일부분인 '금명금야몽(今明今夜夢),비도한강파 (飛渡漢江波)'에서 기인했다. 여기의 '어젯밤 꿈은 한강수를 건너리라' 는 구절에서 몽(夢)자와 한(漢)자를 각각 따와서 몽한각이라 칭했다.
건물은 솟을 대문을 출발한 담장이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어 가히 일품이다. 두 단의 높은 축대를 쌓고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후좌우 반퇴(半退)집으로 쪽마루를 사방에 돌린 아주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16년,1979년, 1993년에 각각 건물을 보수하였다. 지방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될 정도로 주변 풍광이 빼어나, 재실을 둘러보며 잠시 상념에 잠겨도 좋다.
특히 몽한각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의미로 빼놓을 수없는 점은 바로 이서가 유배당시에 지은 '낙지가(樂志歌)'가 전해지기 때문. 건물 왼편에는 이서의 '낙지가'가 표기된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낙지가'는 순 한문 투로 표기된 한문가사라는 점에서 전남지역 가사문학의 효시 작품으로 손꼽아 문학적 위상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형식은 모두 4ㆍ4조이며, 전체 152구로 그가 남긴 문집 몽한영고(夢漢零稿)에 수록되어 전한다.
'뜻을 즐기는 노래'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귀양살이에 대한 증오와 원망보다는 오히려 거기에서 유유자적한 삶과 기쁨을 찾았다.
작품의 내용은 무궁한 태평성대를 축원하면서, 담주(지금의 담양)의 경치와 미풍양속을 찬양한다. 또 세속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처사로 살았던 중국의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흠모해, 그의 사상을 이어 초가삼간을 짓고, 선현의 도를 본받고 , 안빈낙도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
또한 '낙지가'는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의 뒤를 이어 송순이 '면앙정가'를 창작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도 부여했다.
온 나라가 전임 대통령의 비리 관련 수사로 시끄러운 상황에 왕손의 후손이면서도 지역에서 백성과 안빈낙도를 추구한 이서의 삶과 사상이 새삼스럽게 다가옴은 무슨 연유일까?
한국 국제법학계의 학문적 기틀을 세우고 평생을 후학양성에 힘써온 기당 이한기(箕堂 李漢基) 박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서울대 법대 제자들로 구성된 기당선생 추모비건립위원회(위원장 강영규·姜永奎부산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5일 낮 12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전마을 고인의 묘소 앞에서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제막식에는 이 박사의 부인 김혜경(金惠炅)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와 이수성(李壽成)전국무총리, 이대순(李大淳) 경원대 총장, 김석우(金錫友) 전통일원 차관, 정태익(鄭泰翼) 전 이탈리아 대사, 김수웅(金秀雄)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 이상우(李相禹) 서강대 교수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전총리는 추모사를 통해 “기당 선생은 참됨 그 자체를 일러주신 큰스승이었다”며 “평생을 국적있는 국제법학을 정립하는 데 헌신해 민족자존을 지켜왔고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울 때 국무총리직을 맡아 한국민주화의 이정표인 6·29선언을 이끌어낸 우리들의 사표”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1917년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에서 국제법 교수로 재직했으며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뒤 95년 타계했다.
2일저녁 타계한 고 이한기 전총리서리는 서구에서 형성된 국제법을 한국적 시각으로체계화한 국제법학계의 태두였다.서울대법대교수로 재직중이던 56년과 58년 그가 펴낸 「국제법학(상)」과 「국제법학(하)」는 당시 국내법학교재로는 일본학자들이 유일하게 인용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특히 한일협정 직후인 60년대후반에 펴낸 「한국의 영토」라는 박사학위논문은 독도와 간도등이 한국의 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명쾌하게 갈파한 역저로 평가받고 있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해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며 도일, 동경에서 고교(제4고교)와 대학(동경제대) 시절을 보냈으나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43년 대학졸업후 귀국한 그는 한동안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49년부터 서울대에서 국제법의 학문적정착과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80년9월부터 2년간 감사원장직을 맡았고 87년 5월부터는 한달반가량 국무총리서리를 지냈다. 총리서리에서 물러난 뒤엔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직을 맡아 한일 양국간의 우호증진에 힘썼다. 20여년전 전처와 사별한 그는 제자들과 자녀들의 권유로 서울대음대 김혜경교수(64)와 재혼했다.<임채청>
동아일보 1995-02-04 29면
이 한기
1943년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195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69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1952∼80년 동 법학대 교수 및 학장, 사법대학원장으로 있었고 1970년 국제법학회장, 1972년 서울대학교 연구교수, 1974년 도쿄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1977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5·16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고문직 제의를 끝내 거절한 그는 제5공화국 초기인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의 간청으로 몇 차례 고사 끝에 감사원장을 지냈다. 1983년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 강사, 한일문화 교류기금 이사장, 경기대학교 대학원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1987년 6·29선언 전후로 국무총리서리를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법대 학장으로 있던 1969년, 3선개헌 반대시위를 하러 캠퍼스를 나서는 학생들에게 물벼락을 맞으면서도 관(官)과 학생들을 설득, 3일 만에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화목하나 동화되지 않는다'(和而不同)를 가훈으로 삼아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대했으며, 전공자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강의로 유명했다.
특히 〈국제법 강의〉는 국제법 전공자들의 필독서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의 영토〉는 여러 차례 독도와 간도를 답사하고,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오르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역저였다. 한일 우호증진에 앞장선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綏章)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동백장과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95년 1월 20일 백제문화제 참관과 요양을 위해 아내와 함께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했다.
문일정聞一亭의 애민과 충정, 이최선李最善(1825~1883)-기당 이한기박사의 고조부
이최선의 자는 낙유樂裕이고, 호는 석전石田 또는 석전경인石田耕人이다. 1825년(순조 25) 4월 17일에 담양 장전면(현 창평면 장화리)에서 양녕대군의 15세손인 아버지 규형奎亨과 상산김씨商山金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최선의 가문이 담양에 거주하게 된 연유는 양녕대군의 증손인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가 전라도로 귀양을 왔기 때문이었다. 1507년(중종 2) 8월 26일에 대사성大司成 이과李顆,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 병조정랑兵曹正郞 윤귀수尹龜壽, 내금위패두內禁衛牌頭 김잠金岑, 손유孫洧 등이 중종을 몰아내고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려다 서얼인 노영손盧永孫의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과․이찬․손유는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고, 이찬의 형인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은 경상도 초계로, 동생인 이서李緖는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 이서는 유배된 지 14년만에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귀경하지 않고 대곡면大谷面 등갈리藤葛里에 머물면서 그는 자손들에게 “내 자손은 정치에 나가지 말라”하는 유훈을 남겼다.
그후 이최선의 6대조인 이형정李衡井이 지금의 장전마을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들은 장전이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후손들이 계속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경우 가문이 몰락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과거를 준비하고 과거시험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문은 유학에 종사하면서 문학文學과 효우孝友를 생활화하였고, 이최선은 현자賢子로 양육될 수 있었다. 특히 선현先賢으로부터 처사處事를 바르게 하여 의義로 귀속시키고 독서에 힘쓰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이최선은 이러한 실천을 통해 행의行義를 행동윤리로 삼아 학문의 좌표를 형이상形而上의 이론보다는 행의의 실천을 윤리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최선은 어려서 영민하여 3세에 글을 알았고, 5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아 어른들이 운자韻字를 들어주면 마치 미리 지어놓은 듯이 응답할 정도였다. 항상 어른들 곁에서 의심나는 점을 물어 지혜를 길렀고, 12~13세 때에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다.
그는 15세(1839)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선조 성리학6대가중 한사람인 노사 기정진(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17세(1841)에 어머니를, 27세(1851)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어 스승인 기정진에게 더욱 의지하면서 철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기정진의 문인이 된 이최선은 정성을 다하여 40여 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정자 문하의 여원명呂原明(1039~1116)에게 견주어지기도 하는 노사문하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문은 물론이고 현실에 대한 감각과 실천에 있어서도 기정진의 사상을 계승하며 발전시켰다. 또한 이최선은 노사문하에 있으면서 행의行義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35세(1859, 철종 10)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다. 그 이후 40세(1864, 고종 1)에 초시初試에는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는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시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50세(1874, 고종 11)의 늦은 나이에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열린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응시했으나 초시에 불합격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한강을 건너면서 몸에 지닌 은장도와 옥거울을 물에 던지고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였다.
이최선은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둘 수 없음을 느꼈고, 향촌에 은둔하면서 어지러운 세상과 등지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살 것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에 최치원의 시 ‘대막대 지팡이는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띄우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筇無出山步 筆絶入京書]’와 두보의 시 ‘돌밭 띠풀집은 푸른 이끼로 황량한데, 다만 원컨대 남은 생애 밥이나 배불리 먹었으면[石田茅屋荒蒼笞 但願殘年飽喫飯]’를 붙여놓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현실문제에 대해 눈을 떼지 않았다.
1862년에 지방의 수령과 이서들의 탐학으로 인하여 일어났던 임술농민항쟁 때에 「삼정책三政策」을 상소하였다. 이최선은 삼정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기강의 쇄신으로 염치를 일깨워 힘써 실행하게 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올바른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이치를 밝히는 ‘도학에 힘쓰고[勉道學], 언로를 개방하며[開言路], 인재의 선발을 엄정하게 해야 한다[嚴科程]’고 하였다.
그리고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침입한 병인양요 때에는 종친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의계同義契를 조직하고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로 향하였다. 비록 도착하였을 때는 프랑스군이 퇴각한 후였지만 대원군을 만나 인재등용에 대한 조언을 하였다.
이러한 이최선의 사상과 행동은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기정진의 사상은 주리론主理論 사상에서도 독특한 유리론唯理論으로 리와 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적인 사상이 아니라 리와 기를 하나로 보는 일원적인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유리론 사상은 이최선의 「삼정책」과 의병활동에서 모두 리를 근본으로 하는 행동양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기정진과 이최선이 보여주는 스승과 제자의 돈독한 정은 이최선이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할 때 전해 준 시 한 수에 잘 나타나고 있다.
金城秋色入離歌 금성의 가을빛 이별노래 드리우고
持贈長鞭奈老何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宗姓宜爲編戶倡 종성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橫經孰與揮戈多 경을 빗기는 것과 창을 휘두르는 것이 어느 것이 더한지
但看日月麗黃道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뿐이니
焉有男兒臥綠蓑 남아가 어이 푸른 도롱이 입고 누워만 있으니
客裏若逢賓雁翮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爲傳漢水精無波 한수가 잠잠해 파도없다 전해주오.
그리고 이최선은 무사히 돌아올 것을 바라는 기정진에게 답하는 시를 적어 올렸다.
仗劒西風一放歌 스산한 서풍에 칼을 잡고 크게 노래하니
蒼黃時事奈如何 창황은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臨危成敗非吾度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快死南兒問幾多 쾌히 죽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
是日方承催血詔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晩天容易脫漁蓑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師門贈別慇懃意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歸泊江都誓一波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이렇게 이최선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고, 향촌 유림으로서 은둔과 출사의 뜻을 가진 전형적인 선비로 살다가 1883년(고종 20)에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조선봉건사회의 구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보수․봉건적인 입장이었지만, 백성 위주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모든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기정진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고, 또한 학문에 대한 실천적 행동양식의 근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실척적인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들인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1857~1928)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의거한 인물이었다.성균관成均館의 박사博士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1873~1953)는 이기李沂․윤주찬尹柱瓚․민형식閔衡植 등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최선의 행의적行義的 실천론은 그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졌다. 이최선의 가문을 통해서 한말 위정척사 유림가들의 사상이 항일운동가들에게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장전마을에는 이최선이 책을 읽던 문일정과 영서당迎瑞堂이 남아있다(유성한).
이광수<李光秀;1873(고종10)∼1953)> 이한기박사 조부
자(字)는 미중(美中), 호(號)는 옥산(玉山),
양녕대군의 17세손이며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의 14세손이다.
1900년(광무 4)에 관직(官職)에 제수되어 고종태황제와 순종효황제의 인산에 차비관(差備官)을 지냈고 가자(加資)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 당하관(堂下官)에 올랐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나인영(羅寅永) 등과 같이 독립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동지를 규합하고 활 잘 쏘는 사람 수십 명을 모집하여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대궐 문밖에서 쏘아 죽이려 하였으나 5적 중 권중현(權重顯)을 쏘다가 놓쳐 실패하였다. 왜군(倭軍)에 붙잡혀 유(流) 10년에 처해졌고, 진도로 정배되었으나 고종의 은사(恩赦)로 1년 후 풀려났다. 1907. 7. 3 평리원에서의 그의 판결문(M/F번호 00930550)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19년 독립만세 때에도 널리 책동하였다. 동지인 양한묵(梁漢默)은 옥에서 죽었고, 이광수는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친일파와는 같이 일 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1940년 담양 광주 광산 등 지역 유지들이 학문(學問) 존숭(尊崇)을 목적으로 조직한 보인계(輔仁契)에 관여 하였다. 보인계연의록(輔仁契捐義錄)의 발문은 이광수가 썼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이방기(향년 73세) 우리 대학 명예교수가 4일 별세했다.
(1934~2007)
고 이방기 교수는 유신독재 시절,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던 우리 대학(전남대) 교수들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주역 가운데 한명이다. 긴급조치 9호가 발효 중이던 1978년, 이 교수를 포함한 우리 대학 교수 11명은 유신체제 교육정책의 전체주의·복고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며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가 해직됐다.
이 사건은 유신독재에 침묵해오던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항을 일으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고 이방기 교수는 우리 대학 법과대학을 1회로 졸업하고 1963년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 2000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대학에 몸담으면서 후진 양성에 진력해 많은 졸업생들로부터 사표로 추앙받고 있으며 영미법, 법사상사, 헌법 분야에서 손꼽히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법대 학장과 행정대학원장, 학생과장, 교무과장 등 주요 보직을 수행하면서 법대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으며 숭의 학원 관선이사장, 누리문화재단 이사장 등 사회봉사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고 이 교수는 6일 광주 5·18묘지에 안장됐다.
이한기 박사님도 이노래를 들으면 고향 창평 장화리를 그리워 했을거 같습니다.
멀티미디어는 표시되지 않습니다.
나그네설움을 부른 백년설선생은 1914년생이니 1917년생이신 이한기박사님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한기박사님도 학문연구에 몰두하다
가끔은 흘러간 아니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들으며 머리도 식히고 고향도 생각했으리라. 1993년 3월에 지었다는 나의 묘비명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