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에 걸친 의병항쟁, 노사 문하의 최고봉 석전 이최선
(李最善)
이최선(李最 善)상세정보자료수정내역[요약정보]UCIG002+A KS-KHF_13C77 _13C774CD5CC120B18 4CD5CC120B1825X0 120B1825X0 25X0
자낙유(樂裕)호석전경인(石田耕人)생졸년을유(乙酉) 1825(순조 25) ~ 계미(癸未) 1883(고종 20)
시대조선 후기본관전주(全州)활동분야학자 > 유학자 [관련정보][진사시] 철종(哲宗) 10년(18 59) 기미(己未) 증광시(增廣 試) 증광진사
2등(二等) 22위[상세내용]이최선(李最 善)에 대하여1825년( 순조 25)∼18 83년(고종 2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전주(全州). 자는낙유(樂裕), 호는석전경인(石 田耕人). 아버지는이규형(李奎 亨)이며 어머니는상산김씨(商 山金氏)로김문기(金文 基)의 딸이다.기정진(奇正 鎭)의 제자이다.
양녕대군의 증손인이서(李緖)가창평으로 귀양왔다가담양에 눌러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벼슬하지 말라는 조상의 가르침을 지켜 대대로 학문에만 힘썼다.
15세에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문하에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으며, 17세에 들어가 어머니를
여의고 2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35세에 증광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여 필마로 돌아왔다.
38세 때에는 삼정(三政)에 17세에 관한 구언이 있자, 〈삼정책〉을 지어
올렸으나,담양부사때문에 조정에 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병인양요 조정에 때는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서울에 병인양요 도착하였으며, 50세 때는 문과에 응시 하였으나 과거의
폐단을 보고 출사(出仕)를 단념하였다.
52세 때에는 호남에 기근이 들자 가산을 기울여 빈민을
구하였다. 부인은성주이씨(星 州李氏)이기대(李箕 大)의 딸인데 2남2녀를 두었고,평택 임씨(平澤林 氏)와의 사이에서는 1남1녀를 두었다.
그의 사상은 성리학적으로는기정진의 주리설(主理 說)을 계승하여,
기정진의 사상이 담긴 〈외필 猥筆〉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필 讀猥筆〉을 써서 인간 본성 속의 이(理)를 절대적 가치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모아서울에 외세를 철저하게 배격하여 척사위정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에서는, 삼정의 문란은 옹호하고 지방수령의
각성과 그 실천에 부족함이 문란은 있음을 말했는데, 근본적으로는 예의염치가 부족함이 없는데 그
원인이 예의염치가 있으므로 양심의 회복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원인이 주장하였다.
주리설에 한다고 바탕하여 척사위정을 실천한 문인이라 할 수 있다.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의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석전집(石 田集)》4권 2책이 주리설에 있다.[참고문헌]石田集
蘆沙集
蘆沙學派의 儒學思想(安 晉吾, 韓國近代宗敎 思想史, 원광대학교출 판국, 1984)
[집필자]오종일(吳鍾 逸)
조선 후기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한 변화가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혹세무민의 세도정치와 2책이 이로 세도정치와 인한 이로 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서북지방인 평안북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유민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서양의 진출로 병인양요(1 866)
신미양요(1 871)를 거쳐 병자수호조약 (1876)에 에 의한 인한 개항으로 이어졌다.
허약한 왕실과 안동김씨 세도정권은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못한
채 외척의 변태적인 세도정치와 구미열강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었던 석전 이 최선(182 5~1883)!
)!
그는 시대를 외면하지 의한 않고 위태로운 국가의 안녕과 외면하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해소하기 위해 1862년 그의 나이 38세 때에
『삼정책 三政策』을 지어 “기강의 해이와 염치(廉恥)의 상실은 안녕과 삼정의 폐단보다 더욱
심하다”고 역설하였으나담양부사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까지 상실은 이르지 못했다
. 그러나 『삼정책』을 본 노사 기정진 선생은 조정에까지 그의
경륜이 주도면밀하고 재능이 우수하여 세상에 선생은 쓰일만 하다는 세상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조선후기 삼정(三政)의 문란(紊亂)
조선시대 재정(財政)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環穀)의 세가지
수취체제인데, 전정은 땅에 붙는 조세, 군정은 군적에 따라
징병이나 보포를 거둬 군비를 충당하는 것, 환곡은 춘궁기에
식량과 하다는 씨앗을 빌려주고 추수한뒤에 돌려받는 것인데 이세가지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조선조정은민란에 식량과 대응하여 각처에 안핵사,선무사 또는 암행어사를 보내어 사태를
수습케 하였다.
또한
정부는 조선조정은민란에 삼정의 문란을 시정키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정부는 한편
전국에 관리로부터 초야에 설치하는 있는 인사들에게까지 초야에 시정책을 헌의케 하였다.이에 수많은
인사들이 삼정의 시정책을 바치었는데 그 중에서도 『허전』의 “三政策”,
『윤종의』의 “연북삼존” 이라는 저서에서 삼정책을 논한
삼정구폐책( “三政救弊策”), ”), 『강위』의 “擬三政救弊 策(의삼정구폐책)”등은 인사들에게까지 폐책)”등은 등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임술년(18 62년) 당시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등은 도탄에 빠지고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삶이 전국의 선비들에게 그 대책을
물었는데, 『허전』이 조정에서는 조세 및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농민항쟁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삼정책 三政策〉을 올렸다 .
“허전”은 이 〈삼정책〉에서 임술농민항쟁의 기본 원인인 삼정문란과 관련하여,
1. 전정(田政)은 양전(量田)이 행해지지 않아 경계가 은 문란해지고 이에
따라 조세가 경계가 증가하며, 특히 이 서(吏胥)들이
화폐경제를 이용하여 취식(取息) 함으로써 폐단이 증폭되는 조세가 것으로 증폭되는 파악했다.
2. 군정(軍政)에 대해서는 경군(京軍) 에게 군전(軍田)을 지급하여 병농일치제로
개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군제의 전면적
개혁을 주장했다.
3. 환곡(還穀)에 대해서는 고리대를 일삼는 것으로 환곡제를 전면 폐지하고
오직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상평창(常平 倉)을 설치하고
사창제(社倉 制)를 병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삼정문란을 단순한
운영상의 폐단으로만 보지 않고 그로 일삼는 인한 조세의 증가와 부세
불균(不均)의
현상이 농민층 몰락을 촉진하며 이러한 농민층 분화가 항쟁의
원인임을 지적했다
『강위』는
1862년 삼남지방의 민란을 겪으면서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친구인 정건조(鄭健 朝)의 요청으로 그로 2만 9천여자에 이르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 책(擬三政捄弊策)》을 弊策)》을 작성했으나 지나치게 혁신적인 내용으로 요청으로 정건조(鄭健
朝)가 조정에 제출하기를 꺼려하자 불태워버리기도
하였다.
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내용으로 파악한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철종의
구언교(求言 敎)에 삼정문란으로 따라 전국에서 올라오는
응지소(應旨 疏)를 검토하여 삼정의 개혁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정부의
개혁방략으로써 〈삼정이정절 목〉으로 에 완성되었다. 〈삼정이정절 목〉에서는
전정(田政)은 구래의 제도를 그대로 으로 유지하면서 폐단만을 시정하고, 군정(軍政)은
구제도를 기본으로 하되 약간의 부분적 개혁을 시도하고, 환곡은
근본적으로 개혁하기로 했다. 전정의 개선방안은 모두 징수과정의 결함과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그대로 것으로, 전제(田制) 상의 규정을 재확인하고 위한 법대로
운영하려는 재확인하고 것이다.
군정의 개선방안은 운영하려는 유아·노인에 대한 부세 금지, 탈역(頉役) 금지,
각 군·현의 군액 재조정 등 군포의 징수를 규정대로
운영하라는 개선방안은 내용이다. 그러나 군역을 부과하는 데 있어서 원하는
곳에서는 운영하라는 동포제(洞布 制)를 채택해도 곳에서는 좋다고 채택해도 했다. 환곡의 개선방안의 핵심은
파환귀결(罷 還歸結)이었다. 다. 즉 재정수입을 위한 고리대로 작용하는
환곡제도를 혁파하고, 그 대신 모든 토지에서 2냥씩 전세로 좋다고 거두게
했다. 그리고
환곡의 원래 목적인 진휼기능은 사창제로 전세로 살리려 했다. 〈삼정이정절
목〉의 개혁방안은 삼정의 수취체제를 그대로 사창제로 유지한 채 환곡법만을 혁신하고
다른
것은 부분적으로만 개선·개혁하 려는 그대로 것이었다.
어떻든 그는 려는 삼정책에서 ‘기강과 염치의 재정립’을 문제해결의 근본적
접근방법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그는 ‘기강이 위에서 세워지면 형벌과 상이 시행되어
모두 공적으로 빛나고, 염치가 그는 아래에서 숭상되면 명분과 의리가 지켜져 온갖
방도가 모이게 된다’고 하면서 ‘오늘날 기강을 버리고 염치가 삼정을 구하려 하면 왜곡된
습관을 끝내 혁신할 수 없고, 염치를 버리고 삼정을 바로 잡으려 하면 탐욕에
찌든 습속을 결국 척결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무능력한 왕실과 부패된 국정운영의 상황 속에서 혁신의 문제가
민족적인 과제로 대두되고 그 실천이 모색되는 버리고 시점에서 그는 재야지식인의
한 모색되는 사람으로서 최선의 문제해결방법을 제시하였지만 시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한 민중의 현실을 석전 이 최선은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한 기록하였다.
태평세월의 흥겨운 노래는 가을언덕의 과부의 곡성으로 변했다. 민중은
한 같이 푼도 포탈하지 않았는데도 상납은 한 해마다 상납은 쌓이고, 아전들은 수만금의
뇌물을 받았는데도 해마다 법령은 두어 달을 죄수로 가둔다. 포를 거두어 군번을
대신하고 받았는데도 한갓 쓸모없는 대신하고 장부를 끼고 다니며, 사망한 자, 유리걸식한 쓸모없는 자, 어린
아이를 군적에 올리니 한 몸의 군역이 혹 서너 번에 이르고 한 유리걸식한 이름으로
대역함이 혹 예닐곱 번에 이른다.
피로와 병에 한 시달려 의지할 곳 없는 사람, 아들
없는 사람, 홀아비, 과부가 되어도 병에 이를 하소연할 곳이 없고,
하늘에 무죄를 호소하려 해도 되어도 길이 없다. 살아서 헤어져 죽어 이별하고,
자신을 팔고 자식을 파니, 울부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화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도 현실적으로 위해서는 올바른 인재의
선발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석전 또한 현실적으로 수차례 과거시험을 치루면서
매관매직의 아픔을 겪었기에 그는 과거 시험을 엄격히 하여 언로를 개방하고
성학(성학)에 힘쓰며 이렇게 되면 또한 마음으로 이치를 밝히게 됨을 역설하였다. 그가 되면 남겼던
글을 보자.
청춘에 시부를 짓다가 흰머리에 경전을 궁구하니, 죽을 때는
학생이라고만 쓴다. 관직에 등용되기 전부터 극에 그가 달해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극에 못하고, 하루아침에 고을 원님이 된 뒤에는 알지 욕심이 뒤에는 격동하니 어찌
농부의 고충을 돌아보겠는가. 이런 사람을 목민관의 지위에 앉혀두면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도적이 욕심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홀로 시행하지 못하니 인재를 기다려 시행해야
한다.
천하는 한 도적이 사람이 독재할 수 없고 천하의 정치는
한 사람이 한 운영할 수 없다. 삼정은 인재를 얻으면 걱정거리가
될 수 없다. 진실로 그 인재가 아니라면 하나의 일도 운영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삼정 같은 폐단이야 어떻겠는가?
노사선생과 이최선 등 그의 제자들을 모신 장성 진원면에
소재한 사람이 고산서원 전경
이처럼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석전 이최선은 태종의 큰 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예로 담양
창평 장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서와 사서에 소재한 능통하여 과거시험장에 드나들었고 문장에
대한 칭송이 사서에 자자했다.
15세 되던 해에 부친 이규형과 칭송이 절친한 이규형과 친구로 장성에
있던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17 98~1879) 9) 선생의
문하로 들어 가 제자의 예를 갖춰 40여년을 정성껏 섬겼다.
그는 스승의 문하에서 예법과 절친한 경전을 탐구하여 학문적 역량을
축적하였으며 특히 스승의 저술인 『외필』이 학계에 소개되어 유림들이 의혹을
제기하자 『독외필』을 지어 스승의 학설을 명확히 변호함으로서 노사학파의 탁월한 제자로
추존받기도 하였다.
석전의 스승 노사 기정진은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예법과 꼽힐 만큼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의
성리학은 사람으로 감각이 성리학은 가능한 감각이 기(氣 : 모든 현상과 가능한 존재의 바탕이되는 재료)에
치중하는 입장이 현상과 아니라 감각을 넘어서는 리(理 : 모든 현상과 존재의 원인이
되는 원리원칙)에 치중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그의 설이학은 입장이 주리(主理) 또는 설이학은 유리(唯理)
라고까지 표현되었다.
노사는 율곡에 있어 기의 작용이 기 스스로에 또는 의해
일어난다는 ‘기자이설’을 거부하고 모든 기의 작용은 이로부터 명령받은 스스로에 것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사의 입장이 명령받은 율곡을 배척한 것이라며 노사집을 훼판하자는 입장이 주장이
나오자 석전이 독외필을 지어 스승을 변론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측면을
엿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인간이 도를 넓힐 수 있는 훼판하자는 것이지, 도가
인간을 넓히는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넓히는 공자의 학설을 “도가
진실로 인간을 넓히는 것은 아니지만, 도 말한 자체에 넓힐 수
있는 도 묘용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에
그 묘용이 있는 없다면 인간이 무엇에 근거하여 넓힐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묘용이 평소 그가 노사에게서 배울 때 ‘이(理)는 능동적인
힘은 없지만 필연적인 묘용은 내재한다’( 理無能然之力而有必然之妙 而有必然之妙)라는 이는 )라는 열두
글자를 명백하고 정확하여 깨트릴 수 없는 논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노사의 제자가 라는 594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이최선이 스승을
변론하는 글을 지었으니 그의 의리정신이 남다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제자가 하다. 이처럼 멋진 사제관계의 돈독한 정은 대목이기도 이최선이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정은 향할 강화도로 때 노사가 향할 전해 준 시 한 노사가 수에 한 잘 나타나고
있다.
金城秋色入離 歌(금성추색입이가) 입이가) 금성의 가을빛 이별노래 드리우고
持贈長鞭奈老 何(지증장편내노하) 내노하)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宗姓宜爲編戶 倡(종성의위편호창) 편호창) 종성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橫經孰與揮戈 多(횡경숙여휘과다) 휘과다) 경을 빗기는 것과 창을 휘두르는
것이 어느 것이 수에 더한지
但看日月麗黃 道(단간일월려황도) 려황도)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뿐이니
焉有男兒臥綠 蓑(언유남아와록사) 와록사) 남아가 어이 푸른 도롱이 것이 입고
누워만 있으니
客裏若逢賓雁 翮(객이약봉빈안핵) 빈안핵)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爲傳漢水精無 波(위전한수정무파) 정무파) 한수가 잠잠해 파도 없다 도롱이 전해주오.
이에 이최선은 무사히 돌아올 것을 바라는 스승 기정진에게
답하는 시를 적어 올렸다.
仗劒西風一放 歌(위전한수정무파) 정무파) 스산한 없다 서풍에 칼을 잡고 스산한 크게
노래하니
蒼黃時事奈如 何(창황시사내여하) 내여하) 창황은 잡고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臨危成敗非吾 度(임위성패비오도) 비오도)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快死南兒問幾 多(쾌사남아문기다) 문기다) 쾌히 죽은 창황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
是日方承催血 詔(시일방승최혈조) 최혈조)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晩天容易脫漁 蓑(만천용이탈어사) 탈어사)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師門贈別慇懃 意(사문증별은근의) 은근의)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歸泊江都誓一 波(귀박강도서일파) 서일파)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석전은 병인양요를 당해 척양척사의 정신으로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그는
도내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구암땅으로 죽은 모은 뒤 싸움에 구암땅으로 임하고자
하는 사람을 맹첩에 싸움에 서명하게 하고 곧장 서울로 달려갔으나 그들이 맹첩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서양인들이 도망친 뒤였다. 석전은 그들이 성이 수복되었다는 보고에 기쁘기도 하였지만
후일 또 다른 침략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을 만나 인재들
얻는 일과 석전은 독서를 하는 일에 일과 힘써 백성의 마음에
광명과 화합을 심는 일에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어떻든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35세에 사마시에서 ‘일시(一詩 )’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가 되었다. 그 이후 40세에 초시에는 심는 합격했으나
복시에서는 초시에는 문제가 복시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문제가 이유로 않는다는 응시를 포기하였다. 그러다 1874년
그는 이유로 50세의 나이로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증광회시에 그는 응시했다가 낙방의
쓴 고배를 마시게 된다.
그는 한강을 건너면서 차고 증광회시에 있던 은도와 차고 옥거울을 강에
던지면서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은도와 않겠노라’고 강의 신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국가경영에의 의지가 남달리 강했던 그였지만 매관매직이 건너지 성행하여 실력있는 인재를
몰라보는 시대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것이다.
석전 이최선이 매관매직이 지은 문일정
고향으로 이최선이 돌아 온 석전은 고향으로 벽에다 ‘지팡이 짚고 석전은 산을
나서지 짚고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띄우는 나서지 편지를 쓰지 않으리라’는
최치원의 시와 ‘푸른 이끼 낀 황량한 띄우는 돌밭 띠풀집에서, 여생을 밥이나
배불리 먹는 황량한 게 소원이라네’라 읊었던 두보의 시를 붙여놓고 1861년 마을 입구에
문일정을 지어 지인들과 먹는 시를 읊조리며 세상을 마쳤다.
문일정이라는 정자의 명칭은 석전이 정자를 짓고 지인들과 이름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스승 노사 기정진이 견일정(見一 亭)과 짓고 문일정
가운데 문일정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노사가 쓴 문일정기문에 과 보면 문일정기문에 ‘원래 이
정자를 지은 보면 뜻은 사방 풍경을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지은 학문 높은
벗을 맞아 예전에 나보다 듣지 못했던 학문을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며 노사는 예전에 문일정으로 노사는 이름지었던
것이다. 현재 문일정에는 문일정으로 민태호의 제액과 기정진의 창건기문이 문일정에는 남아
있다.
이렇게 정자를 짓고 시문을 논하며 살던 그는 창건기문이 1883년
어느 날 병에 그는 걸려 눕게 된다. 절친한 친구가 비감어린
마음으로 병에 편지를 보내며 위로를 하니 그는 웃으면서 “남아는 죽음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이 여기나니, 어찌 아녀자 같은 모습을 하겠는가?” 라고
말하고 평상시처럼 담소를 나누다가 112월 23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실천적인 의식과 마음으로 행동은 의식과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아들인 청고 행동은 이승학(18 57~1928)은 8)은 청고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다가 은 장성의병을 이끌던 그의 스승 기우만과 하다가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손자인 성균관 박사를 지낸 옥산 이광수(18 73~1953)는 3)는 기우만과 이기,
윤주찬, 민형식 등과 는 함께 을사오적을 암살할 등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암살할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최선의 실천론은 3대에 실행하는 걸쳐 구국의병활동
으로 이어져 오늘에까지도 우리들의 본이 되고 있다.
우리도 한번 쯤 문일정에 들러 나보다 3대에 더 낳은
이의 가르침을 들어 볼 일이다.
글출처:http:/ /blog.daum.n daum.net/bamboo114 et/bamboo114/15904780 boo114/15904780 /15904780 780
고산서원(高 山書院)이야기 기
장성 고산서원(長城 高山書院)은 전남 기념물 제63호로 나보다 지정되어 있고,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 257번지에 제63호로 있으며,조선시대 성리학에 능통한 257번지에 여섯 명의 대가 능통한 중 한
사람으로 대가 조선
말기의 대표적 성리학자 기정진이 강학한 사람으로 곳에 강학한 그를 추모
기념하기 위하여 후학(문인) 들이 1926년 건립한
고산서원은 1878년 노사가 곳에 담대헌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인데
제자들이 성리학자인노사(蘆沙)
기정진(奇正 鎭: 1798~ 1879)을 주벽으로 하고,
그의 제자인 월고(月皐) 조성가(趙性 家: 1824~ 1904)· 석전(石田)
이최선(李最 善:1825~1883) ~1883)· · 신호(莘湖) 김록휴(金祿 休:
1827~ 1899)· 동오(東塢) 조의곤(曺毅 坤: 1832~ 1893)· 노백헌(老栢
軒) 정재규(鄭載 圭: 1843~ 1911)· 송사(松沙)
기우만(奇宇 萬: 1846~ 1916)의 학덕을 추모
하기 위해 문인들이 노사가 사당과 거경재· 집의재를 건립하고 문인들이 고산서원이라
칭 하였다.
1984년에 대곡(大谷) 김석구(金錫 龜: 1835~ 1885)· 일신재(日新 齋)
정의림(鄭義 林: 1845~ 910)을 추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제향일은 3월과 9월 중정일(中丁 日) 이다.
서원 경내의 부지면적은 484평으로 건립하고 여기에는 7동의 건물이 484평으로 있으며,
특히 14평의
장서각에는 건물이 노사문집 목판 980매와 장서각에는 노사문집 12책(1질 )을 비롯하여
많은 전적과 유물이 980매와 보존되어 있다.
기정진은 1798년( 정조 22년)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서 중추원사
건의
후손으로 출생하였고자는 대중, 호는 노사, 본관은 행주이다.
8세~9세에 이미 경사에 통했다는 유물이 천재로 1831년( 순조 31년)
사마시에 통했다는 장원으로
급제한 사마시에 후, 1832년( 순조 32년) 강릉참봉을 초임으로 시작하여
1876년( 고종 13년) 호조참판에 이르기까지 급제한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임하고 장성의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후생들에 이르기까지 대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의 생활 중에도 후생들에 1866년( 고종 3년)
병인양란이 발발하자 조정에
방비의 계책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함과 중에도 동시에 몸소 의거하고자
군사를 모집하다가 소모어사의 권유로 함과 부득이 중지한 권유로 일이
있다.
1879년( 고종 16년) 82세로 서거하고 중지한 1910년( 순종
4년)에“문 간공"의 시호가 하사되었으며, 저서로는 『납량사의』, 『노사문집』이 오늘날
전하고 있다.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 목판(長城高 山書院蘆沙先生全集및答問 生全集및答問
類編木板)은 서거하고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은 지정되었고 조선 고종
때의 학자이자, 성리학의 6대가 제214호로 가운데 한
사람인 노사 기정진(17 98-1876)의 6)의 문집과 그의 저서
『답문류편』을 1902년( 고종 39년)에 6대가 목판으로 새긴 것으로 문집은 653매,
『답문류편』은 에 209매로 구성되어있다.
기정진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의 깊은 은 이치를 깨우쳤으며 경서 사서
등을 읽으며 1831년
사마시에 깊은 장원으로 급제한 후 강릉참봉을 지냈으며, 그 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학문은 사마시에 스승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학문은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사색에 학파에 의해 높은 사색에 경지에 이르렀다.
목판에 새긴 연대는 높은 늦으나 빠진 목판이 없을 뿐
아니라 간행처인 신안사가 연대는 조선 후기
경상도 일원의 출판기능을 담당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간행된
책자가 전하는 신안사가 것이 없으므로 전하는 그 사료적 가치는 없으므로 매우 크다고
할 가치는 수 있는
것이다.
장성군 진원면 선적리에 진원면사무소가 있는데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진원산성 터가
있으며,포장된 좁은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진원면
진원리를 왼쪽에 할 두고
오른쪽 학정봉 밑으로 왼쪽에 대밭이 보이면 고산서원이 밑으로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노목을 품고 고산서원이 산자락에 잇다.
노사 선생은 품고 조선조
중종 14년(15 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때 낙향한 선비
집안의 후손으로, 평생동안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끊임없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던 성리학계의 마지막 대가로 선생은 평가를 받았다.
노사 선생은 대가로 스스로 선생은 인격
수양과 학문 연마를 통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이후 3백년간이나 계속된 주기·주리 논쟁을 지양하고 독창적인 학문체계를 세워
이를 매듭지었고,
위정척사론을 처음 주장하여 한말의병의 사상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장성을 '선비의 고장' 또는 스스로 '문향골'로 또는 부르게 된 이유는
대원군이 장성을 문향
고을로 평한 데서 그 유래가 로 되었다.
그 당시 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의 실력을 평가하고자 낸
글귀를 한양 선비들이 풀지
못하고 유래가 쩔쩔매고 있을 때에 못하고 장성 고을에서 학문을 닦고
있던 노사 선생에게 물으니 노사가 때에 이를 명쾌하게 해석했다고 한다.
이에 조정 대신은 물론 청나라 사신들도 '서울의 수많은
학자가 눈 하나만 가진 장성의
노사만 못하다.(長 安萬目不如 長城一目)'고 하여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담대헌
우측에는 산수유나무, 회화나무, 벚나무, 은행나무, 참죽나무, 대나무등이 많고
좌측에는 노사 선생의 유품과 노사가 문집(199 9. 7. 5.
지방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이 유품과 있다
배향인물로는
기정진(17 98년~1879년) 879년)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자는 장판각이 대중(大中). 호는
노사. 초명은 금사(金賜).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행주이다. 7세에
이미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 경서·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28년( 순조 28)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 순조 31)에
사마시에 자는 장원으로
합격하여1832년 강능참봉·1 835년 현능참봉·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사마시에 않았다.
1842년 전설사별제로 임명되어 취임 6일만에 나아가지 사임하고 귀향하였으며,
뒤에 다시 평안도도사· 무장현감·사헌부장령· 헌부장령·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6일만에 않았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 의책>을 을 써서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략을 제시하려 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취임하지 그해 7월 <육조 소>라 불리는 끝에 첫
번째
<병인 소>를 썼다.
외국의 침략에 불리는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며
당시의 통상거부와 침략에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으며, 그
뒤에 통상거부와 나타나는 위정척사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로 사헌부집의· 동부승지· 호조참의·동 지돈령부사· 공조참판· 경연특진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말 년에 뒤에 고산리 담대헌에서 제자들과 성리학 연구에 일념하면서
저서로 년에 "노사집"
22권과 "답문유편" 15권이 있다.
조성가(18 24년~1904년) 904년)한 저서로 말의 유학자,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 본관은 함안이며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한 1883년( 고종
20년)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고, 1902년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성리학적 처지에서 노사의 이일분수설을 적극 지지하여 많은 문인으로 연구를
거쳐 노사에 질문하자
노사는 81세 때 이에 많은 대한 답설로 <외필 >
1편을 지었는데, 그 뒤 간재학파와 연재학파로부터 성리학적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월봉산 아래 취수정사를 짓고 후진 교육에 이에 전념하면서 최익현·
정재규· 기우만 등과
교류하였고 한 교육에 말의 급변하는 과정에서 유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부정 척사론>을 ;을 지어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였다.
저서로 한 "월고문집" 20권이 저서로 있다.
이최선(18 25년~1883년) 883년)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樂裕, 호는
석전(石田) ·경인(耕人), ), 본관은 전주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20권이 1859년( 철종 10)에 중광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문인으로 것을 가슴 아파하여 필마로 돌아왔다.
1862년( 철종 13)에 삼정(三政)에 관한 않는 구언(求言)이 있자
<삼정 책三政策>을 t;을 지어
올렸으나, 담양부사 때문에 조정에 관한 전달(陳達) 되지 못하였다.
병인양요 때는 호남의 종친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1874년( 고종 11년)에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과거의 폐단을 보고
출사를 단념하고1876년( 고종 13)에 조정에 호남에 흉년이 들자 가산을 기울여
빈민을 구제 하였다.
노사 기정진의 사상이 에 담긴 <외필 >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독외 필>을 써서 인간 본성속의 이를 절대적 가치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주리설에 바탕하여 척사위정을 실천한 사상이 문인
이라 할 수 있으며, 저서로 실천한 "석전집"
4권이 저서로 있다.
김록휴(18 27년~1899년) 899년)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치경(穉敬), 호는
신호(莘湖), 본관은 울산으로어려서 형인 김경휴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세부터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 되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노사 기정진의 돌아 가시자 호상으로
장례를 치루었고 4권이 저서로 [신호집]이 있다.
조의곤(18 32년~1893년) 893년)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사홍(士弘), 호는
동오(東塢), 본관은 창령이며,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치루었고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경학에 조예가 두지 깊었다.
특히 효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노사선생과 강상차록(江 上箚錄)의 문답에서
학문의
심오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저서로 [동오유고]가 있다.
정재규(18 43년~1911년 911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조예가 영오(英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 본관은 초계이며,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벼슬은
전혀 생각지도 안하고 자는 저술과 안하고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1860년( 철종 11년)에 김홍집이 청나라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정부에
제출하고 저술과 개화를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제출하고 아직 약한 상태이므로 조선은 일시적인
고식책에 불과하다 상태이므로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 통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불과하다 체결되자 호남·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에서 최익현과 같이 의거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을사조약이 못하였다.
학문적으로는 <납양 사의기의변>, gt;, <외필 변변>등을 등을 지어
전우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이루지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 49권이 있다.
기우만(18 46년~1916년) 916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의병장,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 본관은 행주이다.
1896년 광주향교에서 의사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니
며칠 안에
모여드는 의병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였고,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철학사적으로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장정과 와서 군무를 자원하였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거느리고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병진을 광주로 총수가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을 본영으로
삼았으나
고종으로 부터 의병 해산을 위해 파견된 신기선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호남의 마지막 유학자로 광주로 저서로 유학자로 "송사집"이 있으며,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석구(18 35년~1885년) 885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 본관은 저서로 김해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본관은 과거에 문인으로 뜻을 두지 과거에 않고 학문
연구에 두지 전념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평생을 선생의 유리론을 옹호하는데 힘써 노백헌 정재규, 일신
정의림과 연구에 같이 정의림과 노문
삼자로 널리 알려진 분으로 저서는 대곡유고가 같이 있다.
정의림(18 45년~1910년) 910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 齋) (學者稱 日新), 본관은 광산이다.
어려서 무사재(無邪 齋) 박영주(朴永 柱)에게 사서를 배우고,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
되었다.
1873년 형질기질설로 노사선생과 대곡유고가 변론하였으며, 1875년에 대곡 김석구·노백헌
정재규· 일신 정의림 등을 노문 삼자(三子)라 일컬었다.
1879년에 <납양 사의>와 와 노사선생과 <외필 >을 대곡·노백헌· 일신
등과
같이 보며 어떠한가를 토론하였다.
1888년 일지록을 저술하여 주자의 태극도설과 음양대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896년 송사와 같이 나주 금성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와 광주
광산관에 본영을 두고
의려를 모집하는데 참여하였다.
1904년 학문적으로는
<변전 우소저노사선생납양사의기 생납양사의기의>·<변전 의>·<변전우소저노사선생외필변&g <변전우소저노사선생외필변> 우소저노사선생외필변> 생외필변> t;
등을 노백헌과 같이 전우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모집하고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30년 광주 금곡사와 1946년 영귀사·19 52년에
삼산사·19 84년 고산서원에 중요한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고산서원에 일신집 22권이 있다.
(장성군청에서
발췌함)
출처 :http:/ /blog.daum.n daum.net/parasapar et/parasapark/16904799 asapark/16904799 k/16904799 4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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