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전 국무총리 이한기 박사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장전 2012. 1. 9. 11:35

 

세거지(世居地) 이야기(3)

-전 국무총리 이한기 박사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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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은 벼슬살이를 하고 나서 퇴관(退官)하면 자신이 나고 자랐으며, 조상들의 묘소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퇴계 이황(李滉)선생도 조선 선조연간에 벼슬에서 물러나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고 이율곡 선생도 고향가까운 경기도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습니다.

 

1917년생으로 지난1995년에 작고한 전 국무총리 서리이고 서울대 교수시절 세계적인 국제법학자였으며 감사원장(1980-1982)을 역임한 이 한기(李 漢基)박사는 전라남도 담양군 출신입니다.

 

그는 1995년 작고한후 고향인 전남 담양군 장전부락 선영에 잠들어있습니다. 제가 지난 2005년에 가보니 이한기박사묘는 바로옆에 초대 전남대 법대학장을 지낸 아버지 이혁(李爀), 구한말 성균진사(成均進士)인 할아버지 이광수(李 光秀)묘소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한기박사는 생전에도 자주 고향에 내려왔고 오랜기간 주생활 근거지가 서울이었음에도 살아생전에도 고향을 틈나는데로 자주 찿고 돌아가신뒤에는 아버지,할아버지옆에 잠들어계십니다.

 

이한기 박사의 모친은 고산 윤선도선생의 후손인 해남윤씨(海南尹氏)입니다.

 

진정으로 조상을 존경하고 사랑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일제시대 서울 휘문고를 다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옥에 갖히자 고향 담양에서 성균진사였던 할아버지(이광수)가 서울까지 찿아와 손자인 이한기 박사를 걱정하고 노심초사하셨다고 예전에 글에서 보았습니다.

 

이한기 박사는 개인적으로 보면 지난 1987년 저의 직계조이신 회산공 할아버지의 고손이신 지족당 박성인장군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쎴습니다.

 

바로 그 이한기박사가 태어나고 자라서 돌아가신뒤 묻힌 전남 담양에 언제부터 그의 조상님들이 세거(대를 이어 살아옴)하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한기박사는 조선왕실의  즉 조선3대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장형인 양녕대군의 후손입니다.

 

즉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이지요.

 

그럼 언제부터 양녕대군의 자손이 호남 담양에 살게되었을까요?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처음으로 담양에 거주하게된분은 양녕대군의 증손자인 이 서(李 緖)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양녕대군의 큰아들인 순성군(順城君)의 4남인 이산부정(伊山副正) 이사성(李 嗣成)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나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중 그가 26세되던해 1507년(중종2년)에 일어난 이과의 옥사가 있게됩니다.

 

이과가 중종의 이복형제이자 성종의 아들인 견성군 이돈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이서의 중형인 하원수(河源守 ) 이찬(李纘)등과 중종을 제거하려했다는 역모로 큰 고초를 겪게됩니다.

 

이로인해 이한기 박사의 직계조이자 담양입향조가 되는 이서(李 緖)는 큰형인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와 함께 유배를 떠나게됩니다. 큰형인 이면은 경상남도 초계로 이서는 전남 담양으로 가게됩니다.

사건에 연루된 이서의 중형 하원수 이찬은 죽음을 맞습니다.

 

추성수(秋城守) 이서(李 緖)는 담양에 온지 14년되던 해 이과의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져 유배에서 해제되었으나, 서울(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담양의 산천과 인심이 좋아 여생을 보내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기릅니다.

 

나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1파 동정공파중 수화(遂和)공의 차남인 월영당 이홍(以洪)선생의 자손들이 전남 당양 창평일대에 거주하는데 바로 이 전주이씨 양녕대군후 추성수 이서공파의 집안들과 혼인하고 교류했다고 합니다.

 

보성의 함양박씨 회산공후손들이 보성의 광주이씨(廣州李氏),죽산안씨(竹山安氏)등과 교류했듯,담양내에서 서로 비슷한 지체의 집안들끼리 따님을 데려와 며느리로 삼고 또 따님들을 시집보내 그 집안의 며느리로 삼았지요.

 

이한기 박사의 직계조에 우리 함양박씨 동정공파후 월영당 이홍가문의 따님이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지난2005년경 이한기박사의 6촌되시는 어른께 여쭈어보니 인근 함양박씨들과도 혼사가 많았다고 하니, 혹시 이한기 박사의 몸속에도 우리 함양박씨의 피가 섞였을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이런 인연으로 1917년 세계적인 국제법학자이자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한 이한기,초대 서울공대학장으로 세계최초로 비날론을 발명한 이승기(李升基)박사 같은 후손들이 나오게 됩니다.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양녕대군의 증손자 추성수 이서파)가 전남 담양에 세거(대를 이어 삶)하게된 연유입니다.

 

추성수(秋成守) 이서공(李緖公)의 재실(제사모시는 건물)인 몽한각은 조선순조대(1803년)에 같은 양녕대군파의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와 창평현령(昌平縣令) 이훈징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습니다.

 

<이한기 박사 세계도>

 

1. 이태조(李太祖)

 

2. 태종 이방원(李 芳遠)

 

3. 양녕대군 이제(李褆)

 

4. 순성군(順城君)

 

5. 이산부정 이사성(李 嗣成)

 

6. 추성수 이 서(李 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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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수(李 光秀)

 

이 혁(李 爀)

 

이 한기(李 漢基)

 

 

 

 

 

 

 

 

 

 

 

 

 

 

 

 

 

 

 

 

 

 

기당 이한기박사 추모비 담양에 건립

한국 국제법학계의 학문적 기틀을 세우고 평생을 후학양성에 힘써온 기당 이한기(箕堂 李漢基) 박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서울대 법대 제자들로 구성된 기당선생 추모비건립위원회(위원장 강영규·姜永奎부산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5일 낮 12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전마을 고인의 묘소 앞에서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제막식에는 이 박사의 부인 김혜경(金惠炅)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와 이수성(李壽成)전국무총리, 이대순(李大淳) 경원대 총장, 김석우(金錫友) 전통일원 차관, 정태익(鄭泰翼) 전 이탈리아 대사, 김수웅(金秀雄)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 이상우(李相禹) 서강대 교수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전총리는 추모사를 통해 “기당 선생은 참됨 그 자체를 일러주신 큰스승이었다”며 “평생을 국적있는 국제법학을 정립하는 데 헌신해 민족자존을 지켜왔고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울 때 국무총리직을 맡아 한국민주화의 이정표인 6·29선언을 이끌어낸 우리들의 사표”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1917년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에서 국제법 교수로 재직했으며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뒤 95년 타계했다.

<담양〓정승호기자>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