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검은 고드름

장전 2011. 1. 26. 06:18

[여적]검은 고드름

경향신문 | 김태관 논설위원


고드름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수수께끼가 아니다. 누구나 다 아는 동요에서 답을 찾아보자.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아요." 아동문학가 류지영이 노랫말을 쓰고 윤극영이 곡을 붙인 동요다. 1920년대 초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고드름'에는 요즘의 어린이들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몇 개 들어 있다.

우선 '발'은 대나 갈대 따위를 엮어서 창문 등을 가리는 물건을 말한다. '영창'은 비치는 창, 곧 유리창이다. '각시'는 예쁜 계집이고, '각시방'은 인형이나 새색시가 있는 방을 가리킨다. 그런데 '고드름'에는 이런 예스러운 말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2, 3절도 마저 살펴보자.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세요/ 낮에는 해님이 문안 오시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 오시네// 고드름 고드름 녹지 말아요/ 각시님 방 안에 바람 들면/ 손 시려 발 시려 감기 드실라." 따라부르노라면 미소가 절로 인다. 밝고 경쾌한 것이 일제 때의 노래 같지 않다. 그 옛날의 '고드름'에는 해맑은 동심이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처마의 낙수가 얼어붙은 고드름은 차지만 따뜻하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훈훈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고드름에는 각시방이 궁금한 동심과 예쁜 아씨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나 하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드름에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어느 시에 담긴 아빠와 아이의 대화다. "아빠, 고드름이 많이 열리는 집이/ 행복이 많이 찾아오는 집이라면서?/ 그럼, 그럼/ …봄이 와도 고드름이/ 쉽게 녹지 않는 우리집/ 그늘진 산 아래 마을/ 고드름 부자 우리집."(나태주·고드름) 봄이 와도 응달은 쉽게 안 녹는다. 고드름은 그런 동네의 가난한 처마 밑에 열린다. 그러나 그 고드름은 달빛을 머금고 별빛을 담는다. 고드름 부잣집은 그래서 그늘져도 늘 환하다.

슬레이트 지붕의 처마에 달린 고드름에서 석면이 검출됐다고 한다. 달동네에는 슬레이트 건물이 많은데, 어린이는 그런 고드름을 만지지도 말아야 한다는 게 환경보건시민센터의 당부다. 동심이 담긴 수정 고드름은 옛말인가 보다. 요즘의 고드름에는 1급 발암물질이 들어 있다. 얼마 전에는 고층아파트의 고드름을 제거하던 소방대원이 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제는 흉기처럼 변해 버린 고드름이 무섭다. 아니, 고드름을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이 무섭다.

< 김태관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