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일기 가는 길
조선 중기 관리였던 미암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를 토대로 소설 형식으로 정창권(고려대 한국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 풀어 씀. 사계절)씨가 재구성한 것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특이하다. 먹을거리와 입던 옷, 침실 생활과 무슨 생각을 하고 가족과 사회가 굴러가는 자잘한 이야기를 적었다. 당시 사람들의 소소한 생활상과 관련된 숱한 물음에 이 책은 재미난 풀이를 해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양성이 거의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남존여비’라는 일반적 인식을 확 뒤엎는다. 아들, 딸의 구별이 없었으며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는 상속이 이뤄졌고, 조상의 제사도 자녀들이 돌아가며 지내는 게 보편적이었다.
“우리가 흔히 안다고 생각하는 조선은 17세기 이후의 조선이다. 16세기만 하더라도 남존여비 사상은 확정되지 않았고, 고대부터 이어져온 여권존중 전통이 남아 있었다. 또 제한적이나마 신분상승이 가능했고, 유교 이외에 불교·도교가 공존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신라, 고려, 조선 중기까지의 세계가 남성 중심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특히 여성들은 학문이나 사회적인 활동에서 자유로웠다. 신사임당(1504~51), 허난설헌(1563~89), 이매창(1573~1610) 등이 이 때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간 사회활동이 자유로웠던 당시 여성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아왔던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미암일기(眉巖日記·보물 제260호)’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마을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는 연못과 연계정, 미암사당을 만나는 행운을 가질 수 있다. 주변에 대나무 푸른빛이 연못 얼음 위에 뒹굴어 마치 얼음이 밤새 뭇매를 맞은 듯 하다. 그는 매일같이 한문일기를 썼다. 해남 출신의 중소지주로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홍문관 교리를 거쳐 전라감사,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까지 벼슬을 지내고 62세에 은퇴해 한가롭게 살다 죽었다. 그에겐 교양과 재주가 뛰어난 아내 송덕봉과 1남 1녀가 있었고, 고향 해남의 첩에게서 난 세 딸도 있었다. 일반적인 양반의 내력이다. 기대승·이황·이이·허준 등과 교유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 양반은 꼼꼼하기가 이를 데 없다. 집안의 수입·지출·이사·혼례 등 각종 대소사와 신변잡기, 왕실 소식이나 사신접대 같은 역사적 사실 등을 낱낱이 14책에 적어 내려갔다.
수입은 관직생활로 받는 녹봉과 때때로 나오는 임금의 하사품, 지방관리들의 상납과 이웃들의 선물 등이 중심이다. 녹봉은 1월부터 3개월 단위로 받았는데 대개 쌀 13섬·보리 1섬·명주베 1필·삼베 3필이었다. 임금 하사품으로는 노루와 꿩, 대구, 새우, 젓 항아리를 받았다. 육류는 말린 것이다. 각지 지방관들은 고기·생선·채소·양념 등 반찬거리와 칼·가위 등 살림도구, 부채와 종이 등을 제공했다. 지출은 쌀을 위주로 한 주식비가 대부분이었으며 노비 월급과 의복비, 선물에 대한 답례, 각종 부조 등이다. 늘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지방관리들의 도움에 집사고 농장을 갖고는 살았다. 또 양반들은 목욕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걸로 나온다. 겨울에는 아예 목욕을 하지 않았고, 여름에도 제사나 더위가 심할 때만 했다. 자식들에게 아예 목욕을 자주하지 말라고 훈계까지 내렸다. 축적된 기름기가 빠져나간다는 이유에서다. 이들 양반의 생활은 노비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을 거느리며 아침에 일어날 때 방에 등잔불을 켜는 것부터 잠들 때 이부자리 보는 것까지 노비들은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15~17세기 노비 수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되었고 철저한 분업체제로 유지되었다.
또한, 결혼 후 아내의 친정이 있는 담양에 머물면서 해남 본가를 오가며 살았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조선은 흔히 성리학적 질서에 따른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로 알려져 있지만, 미암이 살던 16세기까지만 해도 남녀의 권리와 의무가 동등했다. 집안 안주인의 권한도 세서 미암이 아내에게 혼나는 얘기도 나온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꼈던 미암은 더러 바람을 피웠는데, 한 번은 ‘서너 달 동안 일체 여색을 멀리 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가 ‘그게 무슨 자랑이냐, 자랑으로 치면 담양에서 집을 돌봐온 내 공이 더 크다’고 된통 당하기만 했다. 여색을 멀리했다는 자랑이 무색하게 이 편지를 쓴 지 얼마 안 돼 성병인 임질에 걸려 고생을 한다. 당시 미암은 57세로 전라감사가 되어 집을 떠나 있었는데, 아내가 보고 싶어 잠시 담양에 갔다가 아내에게 병을 옮긴다. 반면 추운 겨울날 대궐에서 며칠 째 숙직하는 남편을 위해 옷이며 이불을 싸서 보내고, 그걸 받은 미암이 임금이 내린 술과 함께 아내에게 다정한 시를 써보내는 등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미암의 아내 송덕봉이 살림을 주관하면서 틈 나는 대로 여가를 즐기는 모습도 재미있다. 매달 한 두 번씩 부녀 모임을 가졌고 임금의 어가 행렬 등 특별한 구경거리가 있는 날에는 매번 나가서 구경을 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바깥 출입이 자유로웠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 <미암일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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