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렀던 흔적들

세계의 트랜스포머 10인_ 뉴스위크 선정

장전 2009. 12. 25. 18:45

 

 

 

Biz。|진정한 트랜스포머 리더십 10인_ 뉴스위크 선정

 

 

지난달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대통령일 것이다. 적어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 룰라의 인기는 그가 브라질 사회에 몰고 온 엄청난 변화에서 비롯된다. 특히 사회경제적 평등 확대, 탁월한 경제정책이 돋보였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자국의 정치, 국가 문화를 개혁한 지도자는 그뿐만이 아니다. <뉴스위크>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재임 기간 중 사회·경제·정치적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이끈 세계 각국의 지도자 10인을 선정했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국가|남아프리카공화국 재임 기간|5년
혁신적 지도자의 대원로 격인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가 해방자’, ‘구세주’, ‘워싱턴과 링컨을 하나로 합친 전지전능한 신’이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1948년 집권 국민당에 맞서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국가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지만 5년간 재판을 받은 끝에 1961년 사면됐다. 1962년 다시 폭파 공작 혐의로 구속돼 종신형을 받고 그 유명한 로벤 섬(Robben Island)에 수감됐지만 1990년 풀려나 평화와 인종 화해 운동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해인 1991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에 취임해 흑인 선거권 보장을 위한 협상에 착수했다. 만델라와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Frederik W. de Klerk) 대통령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듬해 만델라는 대통령으로 선출돼 사회적 화합을 위해 힘썼다. 특히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대중(金大中)

국가|한국 재임 기간|5년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며 실제로 넬슨 만델라처럼 훌륭한 업적으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가장 저명한 반체제 지도자로서 권위주의적인 정권에 맞서 싸운 그는 두 번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으며, 그동안 암살 위협과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1998년 극적으로 정계에 복귀해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로운 여야 정권 교체를 이끌었지만 곧이어 밀어닥친 아시아 외환 위기의 극복에 한동안 매달려야 했다. 특히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포용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덕분에 남북한 간 대화 채널이 열리고 남북 이산가족이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상봉했다. 2003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뒤 올해 서거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Luiz Ina´cio Lula da Silva)

국가|브라질 재임 기간|7년
불우한 청소년기를 거쳐 노동운동가, 다시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 좋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룰라의 인생 역정은 1964년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선 이래 브라질 최초의 좌파 대통령으로서 그가 이룩한 중대한 개혁과도 흡사하다. 그가 이끄는 노동자당은 브라질 사회의 뿌리 깊은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룰라의 정책 덕분에 빈민층에 인기가 높다. 물가 상승률보다 높은 최저임금 인상률, 영세민 가구 대상 보조금 정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 베네수엘라의 좌파 대통령 우고 차베스(Hugo Chavez)와 달리 그는 뛰어난 경제 운영 능력으로 금융 위기를 잘 극복했다. 브라질은 이번 글로벌 경제 위기로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그 덕분에 러시아·인도·중국 등 ‘BRICs 형제’ 가운데 더는 막내 취급을 받지 않게 됐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국가|영국 재임 기간|11년
대처는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전 총리에게서 영국 보수당의 당권을 빼앗은 데 이어 노동당으로부터 정권마저 쟁취한 뒤 제2차 세계대전 후 확대된 복지 제도를 대부분 다시 축소했다. 1979~1990년 총리를 맡아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브리티시 에어웨이스(British Airways) 등 대형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한편 노동조합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외교정책에서도 강한 지도력을 발휘해 포클랜드 섬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치렀다. 그 후 국민의 지지 열풍에 편승해 1983년 재선에 성공했으며,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과 함께 냉전 시대 마지막 10년의 서방 정책을 주도했다. 국민의 반발이 심한 인두세(人頭稅)와 유럽 통합에 회의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어 중도 사퇴했지만, 보수당은 7년 더 정권을 유지했으며 그녀의 국정 운영 철학은 아직도 영국 정치계, 나아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

국가|중국 재임 기간|8년
중국 공산당의 얼굴은 분명 마오쩌둥(毛澤東)이지만 중국을 오늘날의 떠오르는 초강대국으로 키운 인물은 덩샤오핑이다. 그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1950년대 말 마오쩌둥이 주창한 농업 정책과 그로 인한 군중 운동) 중 마오쩌둥의 부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대약진 정책으로 경제가 파탄을 맞자 그 뒷수습을 맡았다. 문화혁명 중 마오에게 숙청된 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도움으로 복권했지만 다시 숙청됐다. 마오가 사망한 뒤 덩은 기어코 공산당 최고 지도자 자리까지 올라 문호를 개방하고 중국에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했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당 지도부는 엄밀히 말해 공산주의가 아닌 수단에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이는 덩이 주창한 실용주의 정책의 소산이다. 그 정신은 1961년 그의 유명한 발언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잘 요약돼 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그는 톈안먼 광장 시위 사태 이후 점차 권력을 넘겨줬지만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헬무트 콜(Helmut Kohl)

국가|독일 재임 기간|16년
독일을 유럽과 유럽연합의 경제·정치 중심국으로 만든 인물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코 헬무트 콜이다.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20세기 후반기의 가장 위대한 유럽 지도자”로 평했다. 1982년 서독 총리에 올랐지만 정말로 그의 진가가 발휘된 때는 1980년대 말이다. 옛 소련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그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 대통령에게 독일 통일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 뒤 양 지역(그리고 대처 영국 총리)의 적지 않은 반대를 무릅쓰고 동독과 서독을 통합했다. 1990년 10월 동독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으며 헬무트 콜은 통일 독일 최초의 선거에서 총리로 재선됐다. 2000년 총리 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 유럽 통합을 강력히 옹호했다.

 알바로 우리베 벨레스(Alvaro Uribe Velez)
국가|콜롬비아 재임 기간|7년
좌파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 우리베 대통령의 지지율이 91%까지 치솟기도 했다. FARC는 주요 마약 조직들이 와해된 뒤 최대 폭력 조직으로 떠올라 수십 년간 국가의 안정을 저해했다. 2008년 여름 FARC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유명 인사 15명을 극적으로 구출한 작전이 벨레스의 최고 업적으로 꼽힌다. 이런 이유로 인기가 치솟자 그의 지지자들이 헌법을 두 차례나 바꿔가며 그의 재임을 이끌었다. 콜롬비아 의회가 승인한 국민투표에서 지지를 받으면 3선도 가능하다.

레흐 바웬사(Lech Walesa)

국가|폴란드 재임 기간|5년
조선소 전기공이던 레흐 바웬사는 그단스크(Gdan´sk)의 노조 운동에 참여하면서 공산주의의 천적으로 혜성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기세는 1980년 대규모 파업으로 절정에 달했다. 정부는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노조를 허용해야 했다. 그 뒤 1년 동안 그는 솔리대리티(Solidarity·연대) 운동의 지도자로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됐다. 하지만 곧 정부의 탄압이 재개됐다. 1983년 바웬사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솔리대리티 운동이 다시 살아났고, 1980년대 내내 폴란드 경제가 악화되면서 공산당 정권은 약화되고 솔리대리티는 강해졌다. 1990년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바웬사는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그는 솔리대리티 운동의 성공을 대통령에 오른 뒤까지 계속 이어가진 못했다. 그의 스타일이 거칠고 뻔뻔하고 변덕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결국 그는 1995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부터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의 영향(그리고 모스크바에 대한 솔리대리티의 저항)으로 동유럽에서 소련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됐다.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국가|이집트 재임 기간|14년
나세르의 이념은 대부분 잊혔지만 그는 여전히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아랍 지도자’로 남아 있다. 그는 1952년 34세의 나이로 일단의 민족주의적인 젊은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국왕(King Farouk)을 권좌에서 쫓아냈다. 파루크 국왕은 1956년 이후 이집트를 지배한 부패하고 방탕한 군주 체제의 마지막 국왕이었다. 나세르는 아스완 댐을 비롯해 급속한 경제 현대화 정책에 착수했다. 1956년 영국와 미국이 차관 약속을 철회하자 댐 건설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이에 반발해 감행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은 군사적으로 성공했지만 나세르는 미국, 소련 그리고 비동맹 운동 등 국제 여론을 등에 업고 외교적으로 그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나세르는 범아랍주의와 아랍 통합의 표상으로 떠올랐으며 그 뒤로도 아랍 문화에 사회주의 이념을 접목한 ‘아랍사회주의(Arab Socialism)’ 개념을 창안했다. 그는 1970년 대통령 재임에 성공한 뒤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조모 케냐타 (Jomo Kenyatta)
국가|케냐 재임 기간|15년
만델라의 역할 모델인 케냐타는 케냐의 건국 시조였으며 이름도 국가명에서 따왔다. 청년 시절 국가 주권의 반환을 요구할 목적으로 식민지 종주국 영국의 수도 런던을 찾았다가 결국 그곳에 눌러앉아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저술한 책이 알려진 뒤로는 사실상 케냐의 대변자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목청 높여 독립을 요구하다가 과격 단체의 일원으로 몰려(혐의가 불분명했다) 케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1년 석방되자마자 독립운동 지도자가 됐다. 영국과 독립 협상을 벌였으며 1963년 총리로 선출됐다. 1964년 독립 후 대통령에 취임해 자본주의, 외자 유치, 서방과의 유대 강화를 추진했다. 1978년 사망 전 일당독재를 추진한 일이 옥에 티지만 케냐는 그의 지도력 아래서 동아프리카 정치 안정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