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천재과학자 재조명 절실 | |||||||||||||||||||||||||||||||||||||
호남현대사 현장을 찾아서②북으로 간 천재과학자 리승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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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사일발사에 이은 핵실험으로 10월, 11월 국내는 물론 국제정세가 어지러웠다. 이 와중에 과연, 북한의 핵기술 수준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사람들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고 있는지에 대한 저간의 궁금증들이 네티즌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소식 가운데, 북한의 저명한 과학자 한 사람이 전라도 담양 사람이란 소식이 나온다.
리승기 박사. 그는 1905년 이곳 창평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떠난 뒤 일본 교토제국대학 화학공업과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아 모교인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민족을 사랑했던 리승기는 일본에서도 제국의 패망을 예언하다 감옥생활을 했지만 일제까지도 그의 과학 기술에 대해서만은 깍듯한 존경을 표하며 자문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11월 귀국, 서울의 경성대학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듬해인 1946년 정부가 제국대학을 서울대학교로 바꾸는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해 고향 담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제자들은 제국 일본마저 인정한 천재과학자 리승기를 가만 두지 않았다. 제자들의 설득에 다시 서울대로 복귀했다. 제2대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북으로 넘어간 것은 서울대 재직 때 6.25가 터진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일제시대부터 민족적으로 알려진 과학영웅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도 그를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북한 전체에서 몇 안되는 박사 과학자 중 한사람이었으며, 일본 교토에서도 합성섬유 제 1호인 비날론(Poly Binyl Acetate)을 발명한 인물이었다. 석유에서 추출해낸 합성섬유에 비해 그의 발명품인 비날론은 석탄에서 섬유를 추출해낸 것. 당시는 물론 오늘날의 과학 기술에 비춰 봐도 눈부신 과학적 개가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북한은 전쟁 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월북을 종용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전쟁으로 북한이 서울에 진주하고,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그에게 김일성의 위임을 받은 한 인사가 찾아와 비날론연구소를 설립해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북으로 가자는 것이다. 이 때 찾아왔던 사람은 북한 산업성 부상인 이종욱. 그의 제안은 선택이 아닌 명령형일 수밖에 없었고, 제자 몇 명과 가족이 함께 서울역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북에 넘어간 리승기 박사에 대한 북한의 대접은 융숭했다. 평안북도 청수 지방에 연구실을 꾸며줬고, 인적 물적 자원을 충분히 제공해줬다. 김일성의 적극적 지원을 받은 연구 결과 1961년 연간 2만톤 생산 규모의 대규모 공장이 완공되었다. 북한 정권은 리승기 박사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제1회 과학부문인민상을 수여하였다. 1967년 북한 영변원자력 연구소장이 되었고, 1980년대 초 과학원 함흥분원장에 취임했다. 리승기 박사가 병으로 잠시 누웠을 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는 김일성이 그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리승기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등 북한 인민에게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은 북한 핵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직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핵 개발은 반대하던 그는 김일성의 끈질긴 설득으로 핵 개발에 참여, 내폭형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이 공로로 김일성 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음이 한국 합동참모본부가 발행한 ‘합참’지에 소개된 바 있다.
창평 시장에서 봉산면쪽으로 나가는 국도 29호선을 타고 5분여 거리를 가다 오른쪽으로 작은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장전마을. 자동차 한 대가 다닐만한 좁은 농로 한 켠으로는 사람 키만한 배롱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늦가을을 맞아 잎사귀도 떨어지고 노란 가지만 앙상하지만, 여름이면 빨간 꽃길이 아름다웠을 길이다.
대숲 아래에 아늑하게 터를 잡고 있다.
양녕대군의 후손 덕수 이씨들이 모여사는 이 마을에서 5공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기씨도 태어났다.
이한기 전 총리는 리승기 박사의 제종 아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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