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정신대 할머니들의 그림 앞에서/ 맹문재
용서에 대하여-정신대 할머니들의 그림 앞에서/ 맹문재
용서는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초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성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치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화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긍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미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승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대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위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동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희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전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시집 『사과를 내밀다』 (실천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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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히 용서를 말하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 나치 부역자 관용에 대한 카뮈의 일갈이다. 프랑스 국민들의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은 가혹하리만큼 철저했다. 정식재판이 열리기 전 성난 프랑스 국민에 의해 처단된 숫자만 2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단 5년 동안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했거나 협력한 배신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단죄였다. 독일정부 역시 나치 만행에 대한 철저한 사과, 반성과 아울러 나치전범 처벌에 앞장섰다. ‘용서는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를 없애가면서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나치전범들을 .색출 처벌하고 있다. 몇 년 전 독일 재판부가 유대인 학살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단순 가담 전범으로 혼자서 걷기조차 힘든 94세 고령의 노인에게 4년형을 선고했다. 법정에서 죄를 뉘우치고 희생자에게 눈물 어린 사과까지 했지만 "눈감을 때까지 죄를 뉘우치라"며 끝까지 냉철한 법의 심판을 내린 것이다. 1970년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참회한 사진은 유명하다.
당시 유럽언론은 “한 사람이 무릎 꿇음으로써 독일 전체가 일어섰다”고 박수를 보냈다. 빌리브란트와 달리 일본의 아베는 지난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발표 다음날 “어제로써 다 끝났다”며 바로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라며 ‘不可逆的’을 말했다. 사과의 진정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계속 망언을 일삼았다. 2차 대전의 전범국가임에도 반성보다는 원폭으로 입은 피해만 강조하며 마치 자기들이 전쟁 피해자인 양 행동했다. 그런 아베의 적반하장이 결국 세계질서에 찬물을 끼얹고 문 대통령의 지적처럼 '막다른 길'로 가고있는 것 같다.
“아니다..아니다...아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란 이렇듯 어렵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인생에서 가장 긴 길임은 사과와 용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가슴 깊은 참회로써 피해자의 가슴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진정한 용서도 가능해진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는 아이가 유괴 살해된 후 오랜 분노와 방황 끝에 기독교를 접한다. 용서가 기독교의 핵심이란 걸 깨닫고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를 갔다. 그러나 신애가 살인범을 용서하기도 전에 그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었다며 편안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신이라고 해서 함부로 용서를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 김근태 의원도 진정한 용서는 신의 영역과 같다고 했다. 이근안이 공소시효가 다 지난 후에 나타나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할 때 언론에서는 김근태 씨가 이근안 씨에 대하여 용서를 했다고 보도하였으나, 김근태 의원은 고맙다고는 했지만 용서했다고 하진 않았다고 훗날 밝혔다. 사과의 진실성도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인간으로서의 용서란 피해자가 죄지은 자에 대해 너그러움을 표시하는 정도일 뿐이다. 생존해계신 위안부 할머니와 징용 할아버지가 몇 분 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언제 용서를 빌고 사과를 했단 말인가. 용서받았다며 ‘불가역적’이라고 가슴을 내밀 수 있단 말인가. 아베의 태도는 메르켈 총리가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라며 대를 이어 기억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다. 그리고 정말로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를 해주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외교자세와 역사인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들은 마치 나라가 잘 사는 길을 가로막고 경제발전에 발목을 잡는 것처럼 어설픈 합의 반대를 주창했던 국민을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당시에도 ‘엄마부대’를 비롯한 보수 단체들은 “아베수상의 사과를 받아드려 더 강한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자”라고 주장했고 지금도 그 같은 논조를 이어가는 보수논객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일본과의 역사적 은원을 정확히 청산하지 못한다면 우리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용서에 대하여’는 12년 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문학축전'에서 맹문재 시인이 할머니들의 그림 앞에서 낭독했던 시다. 난망한 일이겠으나 지금이라도 그들의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만 있다면 얼마든지 아량을 베풀고 화해할 수도 있으리라.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