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나무가 잎들을 절반 이상 떨구어내서 산 전체가 헐렁했다. 여백이 생기니 있는 줄 몰랐던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낯선 전경이 펼쳐지고 보이지 않던 길이 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털어내는 나무들 때문에 산은 여기저기서 버석거렸다. 빽빽하던 산이 엉성한 그물처럼 숭숭 구멍이 뚫리자 천적에게 들킬 위험이 커진 청솔모의 몸짓은 더 민첩해지고 산새들의 지저귐은 한결 날카로워졌다. 가지가 나뭇잎들을 버릴 때마다 산이 가벼워졌다. 하늘로 둥실 날아오를 것 같은 나무의 비어가는 몸뚱이들을 손이 닿을 때마다 쓰다듬었다. 나뭇잎으로 온몸을 두르고 위장전술을 펼치는 육군보병대처럼, 무성한 초록으로 펄럭거리던 나무는 진짜 나무가 아니었을 것이다.
"11월에 태어난 인간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언젠가 내가 시인에게 말했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운명을 점지받았겠지요." 시인이 답했다. 11월이다. 나무가 비로소 나무가 되는 계절. 깊고 고요한 겨울이 목마르게 그리운 시간. 시인이 말했던 '더 많은 시간'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 오래 전 규작 일기 중에서.
인디언들은 부족에 따라 11월을,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강물이 어는 달, 만물을 거두어 들이는 달, 작은 곰의 달, 기러기 날아가는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물물교환 하는 달, 많이 가난해지는 달, 아침에 눈 쌓인 산을 바라보는 달, 이름 없는 달이라고 부른다. 나는 아라파호 족의 피가 흐르는지 언제부턴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르곤 한다.
11월은 가을일까. 아니다. 겨울일까. 아니다. 가을과 겨울을 잇거나 또는 나누는 계절. 까치발 들고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계절. 누구도 11월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다. 내복을 사고 김장을 하고 보일러를 고치며 겨울을 준비하는 달, 아직 멀기만 한 크리스마스를 조바심 내며 기다리는 달. 달디 단 열매도 없고, 붉고 고운 단풍도 없고, 심지어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마저 남아 있지 않은 달. 떨어진 낙엽조차 완전히 썩어 대지에 스며들지도, 눈속에 파묻히지도 못한 달. 그래도 까지밥 몇 알 앙상한 가지 끝에 대견하게 매달려 있는 달.
그 무엇도 11월에는 태어나려 하지 않는다. 헐벗은 생명, 11월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부모가 합체하여 생명이 시작된 그날 또한 2월이나 이른 3월이려나.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꽃도 없는 계절, 아무것도 없는 계절에 잉태되어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인디언의 말로 위로 삼자면, 그래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에 태어난 존재. 모두가 떠나고 그 무엇도 태어나지 않는 계절, 11월에 태어난 생명은 그래서, 제 스스로 생명을 잉태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싹을 피워 스스로 꽃이 되고 스스로 열매가 되어야 하는 운명. 대견하다고, 대견하다고, 애썼다고. 오늘은 칭찬해주어야겠다.